'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참 많은 제목이 붙는 책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고 번역되었지만, 원제는 "Man's Search for Meaning"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 "비극 속의 낙관" (각기 다른 챕터들을 엮은 책이기도 하다) 등 많은 제목들이 이 책을 정의한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을 이 글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이 책은 매순간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나와 같은 인생의 방랑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낙관하는 방법을 분명히 알려준다는 점이다.
스토아 학파 그리고 니체, 쇼펜하우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사상과 결을 같이 하고 있기도 하기에, 작년에 읽었던 니체와 비교해보며 호흡할 수 있었던 점도 즐거웠지만, 내가 이 책을 가슴 아프게 그리고 진심으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던 부분은 결국 삶의 의미를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로고테라피는 라틴어로 "의미"를 뜻하는 "logos"에 대한 테라피를 뜻한다. 현대의 정신 의학 (성적 충동과 욕구에 대한 정신적 기반을 이야기하는 프로이트와는 다소 다른 점) 과는 다르게 심인성 노이로제 (실존적 좌절)을 누제닉 노이로제라고 부르며 병의 원인을 심리적인 것에 두지 않고 인간 실존의 정신론적 차원에 두고 있다. (사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운 이야기들인 것 같다.)
내가 매우 공감하고 있는 로고테라피에서의 책임감에 대한 행동 강령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은 니체의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과 비슷한 이야기이나, 그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니체와 다소 다른 점이기도 하다.
로고 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이 중 두번째 방법은 어떤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 느끼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니체적 모먼트
이제 아래 대목부터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파트. 이 대목을 몇 번이고 읽었는지 모른다. 결국 사랑이, 이 모든 삶에 대한 의미를 관통한다는 사실은 항상 나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너무 아름답고 슬프다..
그 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삶에서의 궁극적 목적, 사실 내 안에 있지만 내 안에 있지 않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내외부적 요인이 나의 삶이자 삶의 궁극적 목적이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모든 사람들, 미워하는 것들, 나의 일들, 내 시련과 우울과 고통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중략)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