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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Jan 23. 2017

하바나 여행기

눈물 없이 못 먹는 쿠바 음식 이야기


지난 해 9월, 늦여름의 끝을 잡고 남편과 함께 다녀온 쿠바 (정확히는 하바나) 여행 이야기를 꺼내본다.

진즉에 글로 풀어볼 생각을 했으나, 말도 안 되는 나의 게으름으로 기어코 해를 넘기고 말았다.


쿠바는 최근 몇 년 간 다녀본 여행지 중 단연코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곳이다.

6여년 전에 중국에서 몇 달 간 살아도 봤고, 라오스나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 이야기도 많이 들어봤지만, 쿠바에서 느껴지던 '공산주의' 체제의 무거운 공기는 여타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저조한 공업 발달과 제한된 무역 상황 때문에 물질적인 생활 수준은 매우 낮았다. 폐허에 가까운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누, 화장지, 비닐봉지 같은 생필품도 구하기 힘들다. 자본주의 국가들을 비하하는, 세뇌에 가까운 국가 교육과 강력하게 통제되는 통신, 언론, 여행의 자유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는다. 제한적으로나마 해외 여행을 할 수 있는 직업군이 운동선수와 뮤지션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쿠바는 스포츠 강국으로도, 또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재즈 국가로도 유명하다. 억압과 통제에서 오는 말 못할 속앓이가 운동과 음악이라는 비폭력적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일까.


쿠바의 면면을 드러내는 여러 요소들 중, 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것은 다름 아닌 '음식'이다. 현지 음식의 맛과 종류, 가격을 체험하며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 제도, 경제 수준, 빈부 격차의 간극, 역사의 흔적까지도 골고루 느껴볼 수 있었다.


제일 처음 느꼈던 쿠바 음식에 대한 인상은 '볼품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행을 가기 전, 나는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나 윤종신의 노래 <쿠바 샌드위치>에서 묘사되는 쿠바 샌드위치를 드디어 현지에서 맛볼 생각에 무척 신이 났던 것이다. 불향이 그윽한 훈제 바베큐, 짭조름한 하몽, 진득한 향의 치즈, 깔끔하게 입맛을 돋워 주는 머스타드와 피클, 그리고 사선 줄무늬가 이쁘게 구워진 고소한 빵까지. 그러나 하바나에 도착해서 먹은 첫 한 끼에 나의 기대감은 처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졌고, 나는 하몽으로 뺨을 한 대 후려맞은 기분이었다.


그 첫 끼의 주인공은 하바나 시내의 한 카페테리아에서 먹은 햄버거였다. 현지 사람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같은 허름한 카페테리아들이 종종 눈에 띄여 그 중 한 곳에 들어갔는데,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고 관광객 기운은 제로인, 말 그대로 현지인들만 찾는 식당이었다. 연습해온 스페인어로 더듬더듬 햄버거 하나와 음료 한 잔을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까만 때가 꾀죄죄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그보다 더 슬퍼 보이는 햄버거 하나가 나왔다. 나는 그 바구니를 받아들고 한참을 멍 때리고 서있었다. 햄버거 사이즈에 맞춰 잘려진 조그마한 종이 한 장. 그 종이 한 장이 짊어진 책임과 의무는 지나치게 버거워 보였다.



빵은 반죽에 물을 많이 탔는지 고소한 맛이나 단 맛이 거의 없었고, 패티는 대체 어떤 고기로 만들었는지 당최 가늠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짐육보다는 첨가물이 더 많이 들어갔을테니, 패티 모양을 한 싸구려 햄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당하겠다. 그 사이에 무기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도 저도 아닌 오이 피클... 그게 끝이었다. 고기 비린내가 심해 한두 입 먹어보고는 음식을 내려놓았다. 옆에서는 인상 좋은 아저씨가 똑같은 햄버거를 맛있게 드시고 계셨다. 짧은 스페인어와 몸짓이 섞인 대화에 우리를 친근하게 느끼셨는지 담배 한 개비도 나눠주셨다. 한 개비어치의 값을 지불하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시던 아저씨... 그리고 정말 볼품없고 맛은 더 없던 햄버거... 마음이 짠하다.


그 다음으로 시도한 현지인 음식은 피자였다. 역시 카페테리아 중 한 곳이었는데, 커피를 마실 요량으로 들어갔다가 피자를 먹는 사람들이 많길래 '현지인 피자 맛집인가' 싶어 우리도 하나 주문해보았다. 커피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몇 백년 동안 스페인 식민지였기 때문인지 미국식 브루잉보다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방법이 더 대중적인 것 같았다. 약간의 에스프레소와 설탕을 섞어 크레마를 내고, 거기에 에스프레소를 마저 부어 마시는게 쿠바 스타일이다. (쿠바 샌드위치는 허상이었지만, 쿠바 커피는 기존의 상상과 비슷했다. 매우 달다.) 그러나 완성되어 나온 치즈피자의 비주얼에 이번에도 우리는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두껍고 딱딱하고 밋밋한 맛의 피자 도우 위에 띄엄띄엄 얹혀진 파마산(으로 추정되는) 치즈 가루, 그리고 케첩보다 묽은 토마토 소스. 다시 생각해도 마음 아픈 피자다. 재료는 너무 부실했고 소스는 너무 멀그레했다. 어떤 여행지에서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나였지만, 쿠바에서만큼은 정말 쉽지 않았다. 함께 사진을 찍어준 카페테리아 직원과 옆에서 맛있게 밥 먹는 사람들 보기가 민망해서 차마 남기지는 못 하고, 맛 없는 피자를 꾸역꾸역 목 뒤로 쑤셔넣고 얼른 식당을 나왔다.


현지인 음식 중 그나마 가장 먹을만 했던 것은 하바나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산타 마리아 해변에서 먹은 포장마차 음식이었다. 바다에서 한창 물놀이 후 배가 고파져, 옆에 있던 가건물의 포장마차에서 닭다리 튀김 하나와 볶음밥 1인분을 시켰다. 네모난 일회용 종이 상자에 볶음밥이 두둑히 담기고, 그 위에 닭다리 하나가 올려졌다. 나름대로 갖은 채소가 들어가 꽤 그럴듯해 보였다. 상자만 건네주길래 숟가락을 달라고 손짓했더니, 주인 아저씨가 단호하게 종이 상자를 가리킨다.

"상자 있잖아. 그 귀퉁이 찢어서 숟가락으로 써."

휴지 한 조각도 공짜가 없는 쿠바에서 일회용 숟가락을 찾다니, 내가 잘못했네. 암요.



비록 치킨에서는 닭 비린내가 나고, 밥에 간은 거의 안 되어 있고, 종이 숟가락은 밥 한두 입 먹고 나니 너덜너덜해져 못 쓰게 되었지만, 그래도 쿠바 현지 사람들이 이런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는 하는구나 확인하고 안도감 비슷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 내내 부실하고 볼품없는 음식만 먹은 것은 아니다. 앞선 햄버거와 피자의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보다 품격 있는 캐리비안 음식과 유로피안 퀴진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특히 하바나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Habana Vieja (Old Havana, 구 시가지)' 구역에는 라이브 살사 밴드가 있는 쿠반 레스토랑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호텔에 위치한 레스토랑, 해외 여느 맛집 부럽지 않은 맛 좋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섬 나라의 특성 상 해산물이 풍부해서 새우, 랍스터, 생선을 주재료로 한 요리가 많고,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다이키리와 모히또를 비롯해 맛난 칵테일도 많다.



그러나 그 유서 깊은 장소들의 폭신한 의자에 앉아서 맛있게 요리된 음식을 먹고 있자니, 자꾸만 목이 메여오는 것은 왜였을까. 쿠바가 스페인과 미국으로부터 명목 상 독립한 것은 1902년,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독재 정권이 시작된 것은 1959년에 불과하다. 북한과 다를 바 없는 탄압과 식량난이 극명하게 존재하는 그 곳에서 홀로 호의호식하는 스스로의 모습은, 단순히 '나는 관광객이니까'라는 말로 합리화하기에는 너무 비겁하고 무책임했다.


과거에 유럽 열강 제국주의자들이 앉았던 의자, 그들이 먹고 마셨던 음식과 술이, 지금은 나 같은 관광객의 1차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수많은 노예를 부리고 학살하던 그 스페인 제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옆에 앉아서 별 생각없이 커피를 홀짝이고 시가를 피워대던 그의 아내랑 다른게 뭘까. 풍부한 해산물에 쨍한 파슬리 향,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던 파스타를 먹으며 그 맛없고 무미건조한 피자가 떠올랐다.


4박 5일의 일정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한 끼는 우리가 머물렀던 민박집 주인 Lindiana가 차려준 아침 밥상이었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뮤지션이라 외국 거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나라, 내 민족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는 당찬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아침밥이었다. 정갈하게 잘린 빵과 과일, 버터향이 나는 달걀, 설탕 크레마 가득한 쿠바 스타일 커피까지.



지금도 종종 그녀와 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해외 투어 공연을 마치고 다시 쿠바로 돌아올 때면, 잠깐 켜졌던 컴퓨터 전원을 억지로 끄는 기분이라고. 풍부한 물자와 음식이 가득한 바다 건너의 세상을 보고 왔지만,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그 세상의 기억을 지우고 생활해야 한다고. 이제는 없이 사는게 익숙하다며 웃는 해탈한 그녀의 표정이 머리 속에 오래도록 머무른다.


많은 여행 책자들이 하바나를 타임캡슐에 비유한다. 유럽이나 미국과의 수교가 재개된지 얼마되지 않았고 국내의 도시 건설 능력도 마땅치 않아, 몇 십 년 전의 도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된 건축물과 클래식한 올드카만이 그 타임캡슐 속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코카콜라 대신 뚜꼴라 한 잔, 한국 맥주보다 더 물 같은 크리스탈 맥주 한 잔에 더위와 생활을 이겨내는 사람들. 음식 상한 냄새과 땀 냄새가 섞인 과일 가게와 파리떼가 엉겨붙는 정육점,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면 반드시 영수증과 물건을 대조해야 문 밖을 나갈 수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당연하게 통과하며 살아가는 쿠바 사람들.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눈과 귀와 입으로 깊이 깨닫는 여행이었다. 폐허가 된 건물 속에서 '나, 아직 여기 살아 있어요'를 외치던, 태연하게 바람에 날리는 빨래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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