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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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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Jun 12. 2017

나의 미니미에 대하여

동생의 탄자니아 직장 생활을 들여다 보았다

아프리카 여행을 간다는 말은 사실 작은 핑계였다.

처음 맞는 결혼 기념일과 여행 날짜가 겹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요되는 일정이나 비행기 티켓 비용이 작지 않다는걸 인지하고서도, 혼자 카타르 경유까지 거쳐가며 탄자니아로 날아온 것은, 솔직히 말하면, 현영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서였다. 나이는 세 살, 학년은 사 년 빠른 언니로서 나는, 반은 딸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또 반은 함께 나누던 수다가 그리운 오래된 친구의 마음으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항상 나의 미니미 같은 존재였다. 나이가 어려서이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키가 나보다 삼사 센티미터 정도 작았다. 내가 245 사이즈 운동화를 신으면 그녀는 240을 신었고, 내가 250짜리 구두를 신을 때 그녀는 245를 신었다. 한 치수 큰 내 신발을 빌려 신으며 그녀는, 언니는 발이 너무 크다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허리도 나보다 일이 인치 정도 작았고, 당연히 몸무게도 나보다 적게 나갔다. 그러나 팔목과 발목이 두꺼운 통뼈 체형인 것과, 두 종아리가 'O'자 모양으로 휜 것 만은 똑 닮아서, 팔다리 사진만 봐도 아 얘네가 자매구나,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녀의 눈과 코는 나보다 좀 더 작은 편이다. 그만큼 얼굴도 그녀가 조금 더 작다. 옆에서 자고 일어나면 주로 먼저 깨어있는 그녀는, 잠에서 아직 덜 풀려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언니, 눈 진짜 크네"라는 말을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는 듯 매일 새롭게 반복한다. 우리는 둘 다 쌍꺼풀이 없는 눈을 가졌고, 잠을 잘 때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가는 습관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남들보다 약한 턱 관절을 가졌다.


외모 뿐만 아니라, 취향의 많은 부분도 닮았다. 고기보다 채소를 더 좋아하는 식성도, 요리를 하거나 장을 볼 때 손이 큰 것도, 백화점 쇼핑보다 재래시장 구경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도 비슷하다. 같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같은 가정 환경에서 자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생일날에는 선물보다 손 편지에 더 크게 감동하고, 감동해서 한바탕 울고, 명품 가방보다는 가죽 공방에서 주인 아저씨가 직접 만들어준 가방을 더 좋아한다. 각자의 하루를 끝내고 돌아온 집에서 브로콜리너마저나 검정치마의 노래를 스피커로 조금 크게 틀어놓고─반드시 스피커여야 한다─맛있는 맥주 한 잔을 닭강정, 알리오올리오, 비빔국수, 떡순튀 등의 야식과 들이켜는 습관도 우리가 함께 자취생활을 한 지난 4년 동안 차곡차곡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도록 빠지지 않는 뱃살의 근원이 되었다.


동생 집 냉장고에 구비되어 있던 종류별 로컬 맥주


내가 한창 인디밴드를 좋아한 덕분에 동생의 음악 취향도 자연스럽게 내 취향에 맞춰졌다. 같이 갔던 홍대의 소규모 클럽 공연들도 떠오른다. 로지피피, 바버렛츠, 시와가 나왔던 공연에서는 CD도 사고 포스터에 뮤지션들 사인도 받았었다. 그리고 그 포스터는 꽤 오랫동안 우리 자취방의 화장실 문 앞을 장식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재밌는 공연에 자주 못 데려가줬던 것 같아 글을 쓰는 와중에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사실 나 재밌는 곳 많이 다녔어. 미안. 반대로 동생의 음악 취향 덕분에 나는 빈지노를 좋아하게 되었다. 'Boogie on&on'과 'Aqua man'이 수록된 빈지노의 첫 솔로 앨범 <24:26>은 귀에 박히도록 많이 들었다. 나에게 힙합은 빈지노가 한계지만, 그녀는 우스개소리로 한 때 랩퍼를 꿈꿨대나 뭐래나. 그래서 프리스타일 랩 하는 사람들의 음악도 곧잘 즐겨 듣는다.


그녀가 내 미니미라는 사실의 가장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증거는 며칠 전에 그녀가 나에게 불현듯 생각났다며 알려준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내가 중학교 1, 2학년이었을 무렵,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를 정하고 그 나라에 대해 조사를 해가는 숙제가 있었다. 해리포터와 J.K.롤링 때문이었는지─이것 말곤 다른 이유를 딱히 찾을 수가 없다─영국을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로 꼽았던 나는, 대영 미술관과 버킹엄 궁전 같은 것들에 대해 조사를 했었다. 네 학년이나 아래였으니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였던 동생은 영국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는 외국 어디에 제일 가보고 싶으냐고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영국이요" 라고 대답했다고. 그냥 언니가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말하니까 자기도 따라서 영국으로 정했다는 거다.


그랬던 미니미가 자라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구했다. 나는 1년이나 한 휴학을, 그녀는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칼졸업을 했으니 우선 그 동력이 대단하다. 인턴 경험 같은 것도 전무한데 바로 구직 시장에 뛰어든 용기랄까 무식이랄까,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고난의 막학기를 거친 끝에 그녀는 1년까지 연장이 가능한 6개월짜리 인턴직을 구했는데, 그게 바로 코이카(KOICA) 탄자니아 사무소에서 일하는거였다. 그렇다. 자원봉사가 아니고 나랏돈을 받고 하는 일이다.


도대체 이 아이가 사무실에 앉아서 일이라는 것을 할 수 있기나 할까 걱정스러웠다. 항상 "모르겠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사는 애가, 내가 볼 땐 워드도 파워포인트도 제대로 능숙하게 다룰 줄 모르는 애가, 회의록과 공문서를 쓰고, 상사와 미팅을 하고, 심지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다닌다니! 보고서를 말도 안 되게 써놓진 않을까, 미팅 중에 혼자 딴 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못미더움을 감출 수 없었다.


국제 협력과 관련된 일을 한다는 사실은 더 큰 충격이었다. 십년 전 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꿈꿨던 분야의 일을, 그 이름도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 어딘가에서 나의 꼬꼬마가 하고 있다니. 혹시 진로마저 '영국'을 제일 가보고 싶은 나라로 꼽던 그 순진무구함으로 '언니가 관심 가졌던 일이니까'라는 단순무식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닌지, 잠깐 의심도 들었다. 며칠 안 되는 기간 동안 직접 동생의 일상을 엿보기 전까지는.


그녀의 사무실이 있는 다르에살람(Dar es Salaam)이란 도시는 탄자니아의 경제수도로 불리는 곳이다. 중국으로 치면 상해 격이다. 해안을 끼고 있는 항구도시고, 사업 목적으로 장기간 머무르는 외국인도 꽤 많다. 대부분의 외국 대사관들도 수도 도도마(Dodoma)가 아닌, 다르에살람에 위치해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탄자니아의 다른 시골 지역에 비해 높은 건물도 많고 차도 많다. 한식당을 비롯한 각국의 음식점과 카페, 베이커리, 심지어 KFC 같은 미국 프랜차이즈들도 들어와있다.


반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도시의 풍광도 많다.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교통 체계와, 그나마 있는 신호등도 잘 지켜지지 않아 사거리마다 서서 교통 지도를 하는 경찰들, 비만 오면 크고 작은 우물을 만들어내는 도시 내 비포장 도로들, 2차선 도로가 자유자재로 3차선, 4차선이 되는 신비로운 교통 질서, 그리고 그 차선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각종 물건을 파는 행상들까지. 특히 이 행상들이 파는 물건은 물, 간식 따위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DVD, 티셔츠, 가방, 충전기에서부터 지도, 인형, 커다란 거울, 심지어는 머리에 수족관을 이고 다니며 파는 금붕어에 이르기까지 셀렉션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세계 각국에서 수입한 (혹은 원조받았을) 낡아빠진 미니 버스에는 난데없이 히라가나와 카타카나가 새겨져 있고,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내뿜는 매연은 낯선 사람의 눈과 목을 마구잡이로 공격한다. 



외국인과 현지인 간의 임금 및 소비 격차가 크기 때문에 (가령, 동생의 20평짜리 아파트를 청소해주는 현지인 언니는 청소 한 번에 7,500원을 받는다.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오기 때문에 한 달에 3만원을 버는 셈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 절도, 외국인에 대한 공격과 폭행 같은 사건사고들도 많다. 외국인임을 감출 수 없는 동양인이 혼자 밤거리를 걸어다니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밤에 잠깐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전화통화를 하던 중, 창문을 깨부수고 들어온 현지인들로부터 가방과 휴대폰을 절도당했다는 한국 대사관 직원의 이야기도 직접 전해 들었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란다.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신변을 위협하는 각종 요소들로부터 항상 긴장한 채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은 심신을 너무나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탄자니아에 도착한지 이틀 만에, '여기서 한 달 이상은 못 살 것 같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 곳에서 동생은 매일같이 경계 태세로 집 밖을 걸어나가고, 운전 기사들과 택시비를 흥정하고, 택시에 올라탄 이후에는 구글맵을 켜서 제대로 된 루트로 가고 있는건지 살피고 있었다. 해가 지는 저녁 여섯시 반 이후에는 대체로 혼자 또 가끔은 몇몇 동료들과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6개월이 아닌, 1년을 있기로 결정했다는 그녀를 보면서 깨달았다. 그녀의 선택이 순진무구 단순무식한 것이 아니라, 오랜 고민과 경험 끝에서 내린 용감무쌍한 결정이라는 것을. 


비즈니스 캐주얼을 차려 입은 그녀의 모습은 제법 성숙해보였고, 직장 동료는 그녀의 야무진 일 처리를 칭찬했다. 현지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곧잘 하는 그녀 옆에서 나는 꿀을 한 주걱 퍼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동생과 스와힐리어로 대화하던 사람이 나에게 똑같이 스와힐리어로 말을 걸어오면,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당황한 웃음을 지어보여야 했다.


어딘가로 이동할 때에는 뒤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잔걸음으로 졸래졸래 따라 걸었다. 7년 전 처음으로 단 둘이 여행했던 캄보디아 씨엠립에서도, 1년 전까지 같이 살았던 서울에서도, 함께 다닌 뉴욕과 애틀란타, 중국 칭다오에서까지도,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갈 곳과 먹을 것을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역할이었다. 그 역할이 순식간에 뒤바뀐 탄자니아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당혹감과 갑자기 호기심 많은 어린이가 된 것 같은 기분과, 출처 모를 뿌듯함에 휩싸여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엄마의 마음으로 갔는데, 되려 자식이 된 기분이라니. 1년 못 봤다고 그 동안 이렇게 훌쩍 커버리기 있니. 내가 영어로 떠들어댈 때, 우리 엄마가 느끼던 기분이 이런거였을까.


나는 한국 나이로 스물 여덟, 만 나이로 꾹꾹 눌려 줄여봐도 스물 여섯하고도 반 년이나 더 먹었는데, 아직 이렇다할 전문 자격증도, 탄탄하게 보장된 앞길도 없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도 이전 회사와는 업종도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나의 이런 막 나가는 커리어 라이프를 보고 동생은 '저렇게 살아도 잘 살 수 있구나' 하고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나를 보고 걱정이 아니라 위안을 받는다는 그녀를 보면, 머리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은 커녕, 나도 내심 기대가 된다. 도대체 너는 커서 무엇이 될까. 내 미니미 아니랄까봐 엉뚱한 사고방식이 떡잎부터 다르다.




* 저에게는 여동생 말고 더 어린 남동생도 있습니다. 삼남매인데 혹시 자매만 있는 걸로 오해하실까봐.

** 다르에살람이 좀 위험해서 그렇지 탄자니아에는 관광명소가 많습니다. 우기라 저는 못 갔지만, 세렝게티를 비롯한 크고 작은 사파리가 많구요, 킬리만자로 산도 엄청 유명하구요. 동생과 갔던 잔지바르라는 섬도 좋았습니다.

*** 사실 다르에살람도 재밌었습니다. 천 시장에서 키텡게 사다가 옷 만드는 언니들에게 요렇게 저렇게 만들어주세요 하면 진짜 그렇게 만들어지는게 매우 신기했음... 이걸로 결혼기념일 선물 겸 커플룩을 맞춰서 남편에게 선물했더니 남편이 매우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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