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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Apr 30. 2017

매우 주관적인 신혼집 탐방

이상적인 신혼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신혼부부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1인 가구의 자취방이나 자녀가 있는 가정의 집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시작', '출발', '새로운 여정' 같은 단어들이 신혼(新婚)을 수식하는 만큼, 신혼집의 의미는 새롭고 특별하다. 새롭게 장만된 가구와 가전제품,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반짝이게 윤이 나는 접시와 수저의 이미지로 신혼집은 곧잘 그려지곤 한다. 구 싱글 남녀들은 마침내 지긋지긋한 원룸 자취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도 신혼집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한낮의 햇살이 테라스 화분 위로 뜨겁게 내리고, 오후 다섯 시의 기우는 해가 거실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집. 값비싼 원목은 아니더라도 따뜻한 우드 소재의 널찍한 식탁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고, 때로는 홀로 앉아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고, 또 자주 남편과 마주앉아 실없는 농담을 헤프게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


그러나 대학 졸업 후부터 계속 미국에서 일을 해온 남편 덕에, 신혼집을 새롭게 장만한다거나 꾸미는 일은 애초에 우리의 선택지에 없었다. 남편이 3년 간 살아온 원베드룸 자취 아파트가 곧 우리의 신혼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결혼 전부터 이미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의 원베드룸은 안방과 거실이 구분되어 있는 형태로, 한국으로 치면 투룸과 비슷하다.) 남편이 살고 있는 집에 옷가지 몇 벌만 챙겨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새 집 마련에서 비롯되는 각종 골칫거리들로부터 자유로웠다. 적당한 위치의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일부터 시작해서 각종 계약에, 이사 준비에, 혼수 장만 같은 문제는 남들 이야기였다. 그러나 막상 들어와 살아보니, 남편의 아파트는 내가 꿈꾸던 로망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나의 가장 큰 불만은 집에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집이 동쪽을 향해 있었으므로 아침에 잠깐 햇빛이 비칠 만도 했지만, 1층에 위치해 있어서 그마저도 건물 기둥과 집 앞 나무들에 가로막혔다. 해가 잘 들지 않으니, 4월 초부터 최고기온 섭씨 28도를 자랑하는 조지아 주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실내에서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있으면 오한이 들어 스웨터나 가디건을 찾기 일쑤였다. 그 뿐이랴. 침대와 매트리스, 소파와 식탁, 심지어 주부들의 로망인 각종 그릇과 수저까지 모두 남편이 처음 이사올 때 장만한 것들이라, 내 취향이 반영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아, 중고샵에서 산 인테리어 소품 몇 개 정도는 내 취향이려나? (미국의 Thrift shop에 관한 글 참고) 식탁은 철제 다리와 유리 상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우드 느낌은 커녕 오히려 차갑고 서늘한 느낌이 감돌았고, 침대로 변신 가능한 소파베드는 소파로 쓰기에도, 침대로 쓰기에도 불편했다.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면 결혼 선물 명목으로, 혹은 양가 부모님들의 보살핌으로, 식탁 하나쯤은 내 맘에 드는 걸로 바꿔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못내 들었다. 아쉬움을 가득 안은 그 아파트는 만 1년째 나와 남편이 함께 살고 있는 신혼집이다.


형제자매도 아니고 룸메이트도 아닌,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산 처음 일 년 동안, 우리는 많이 웃고, 싸우고, 울다가 또 화해하고, 행복했다. 오랜 장거리 연애 끝에 시작된 결혼 생활이라, 우리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순간들이 많았다. 함께 장 봐온 재료들로 생전 처음 해보는 요리에 도전하고, 좋아하는 예능 프로와 치맥으로 금요일 밤을 자축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시답잖은 농담들로 몇 시간을 웃고 떠들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다. 그럭저럭 평범하게 보낸 하루도 서로에 대한 격려의 말 한 마디로 특별해졌다. 반면, 처음 맞춰가는 생활 리듬에 크고 작은 충돌도 많았다. 설거지를 해놓고 쉴 것이냐, 충분히 쉬고 나서 설거지를 할 것이냐 같은 문제를 두고 몇 번씩 신경전을 벌이는 일은 기본. 크게 다툰 날에는 각자 안방과 거실을 차지하고선 토라진 채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꽉 찬 일 년을 보내는 사이, 햇빛 안 들고 내 취향도 아닌 이 아파트는 '편한 집'의 기준이 되었다. 며칠 간의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아. 역시 집에 오니 좋네." 소리가 나도 모르게 되뇌어졌다. 다른 형태, 다른 조건의 집이었어도 결국 내 집이니까 정들게 되지 않았을까.


생활의 리듬이 안정되고 나니, 마음에도 제법 여유가 생겼다. 도대체 집에 대한 나의 로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왜 나는 몇 달 동안 햇빛과 가구와 인테리어에 집착하며 전전긍긍했던 것일까 생각해봤다. 중요한 건 집이 아니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방식과 질이라는 사실도 자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집이 기본적인 편의와 안전이 확보된 곳이라는 전제 하에서 하는 말이다.) 1년 전의 나는 다른 신혼 부부들의 야무진 셀프 인테리어 후기를 보며 존경과 부러움, 그리고 얼마간의 대리 만족을 느꼈었다. 지금은 조금 회의적이다. 나의 신혼집이 그만큼 깨끗하고 예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요즘은 블로그 속 판타지에 등장하는 신혼집 말고, 현실에서 마주치는 부부들의 집과 라이프스타일에 더 많이 놀라고 깨닫고 배운다. 흔치 않은 진국 신혼부부들의 이야기다.




내가 아는 한 신혼부부는 뉴욕 맨하탄의 원베드룸에 살고 있다. 매달 나가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월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거 환경은 그닥 좋지 못하다. 우선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오래된 목조 건물의 삐걱이는 소리와 낡은 뉴욕 아파트 특유의 시큼달큼한 냄새가 방문객을 반긴다.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으므로 집이 위치한 4층까지 열심히 계단을 걸어 오른다. 현관문을 열면 가장 먼저 아담한 부엌과 식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단정한 얼굴을 한 나무색의 부엌이다. 부엌을 지나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소파와 TV가 놓여있는 거실이 있고, 그 끝에는 바깥을 향해 창이 나 있다. 반대편, 즉 부엌 왼쪽에는 부부의 침실이 위치해 있다. 부엌과 침실을 구분하는 벽이 있긴 하지만, 별도의 문은 없다. 침실은 침대와 옷장, 램프만으로 꽉 찬다. 그리고 그 침실을 완전히 통과해야만 화장실에 갈 수 있다.



이 부부는 일이 주에 한 번 꼴로 집에 손님을 맞이한다.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에는 열 명쯤 되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대접한다. 계획적이고 부지런한 성격 덕에, 손님을 여럿 초대하는 경우에는 따로 웹페이지를 만들어 각자가 준비해올 음료나 음식, 물품들을 정한다. 나름대로 비용을 공평하게 나누고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파티 타임을 만들기 위해서다. 와인, 맥주, 안주, 디저트 등의 항목을 만들어 손님들이 각자 자신이 원하는 항목을 준비해오는 식이다. 집에 의자 개수가 충분하지 않아 손님들 중 몇몇은 자기 집에서 의자를 챙겨오기도 한다. 접시나 커틀러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일회용품은 쓰고 싶지 않다며, 꼭 재사용 가능한 제품들로 챙겨오라고 당부한다.



가끔 다른 지역에서 친한 친구가 놀러오면 기꺼이 거실에서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비싼 뉴욕의 숙박료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본인들의 코 고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도, 손님이 화장실을 가려면 본인들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지나다녀야만 하는데도, 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거실에 머물던 손님이 화장실 들락거리는 일을 미안해 할 정도다. 이들 부부에게 집은 어떤 공간일까? 애초에 집은 여러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뉴욕에서의 생활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희생 정신을 밑거름 삼아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걸까?




내가 아는 또 다른 부부는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살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대표적인 기업들이 위치한 곳이라 그 동네도 집 값이 만만치 않다. 이 부부 역시 원베드룸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는데, 같은 원베드룸인 우리 집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다이닝 룸과 거실이 별도의 구분 없이 배치되어 있고, 거실 뒤로는 햇빛을 받아 환한 테라스가 보인다. 부부가 동시에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거실은 두 개의 책상과 세 대의 컴퓨터, 그리고 (신혼부부의 집 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로 가득하다. 책상 뒤쪽으로는 간이침대가 놓여져 있어, 이를 소파 겸 세컨드 베드로 사용한다. 현관에 서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아담한 부엌이 있고, 거실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침실, 화장실, 다용도실로 각각 연결된다.



채식주의자인 이 부부는 하루 한 끼는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매일 집에서 밥을 지어 먹는다는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장 봐온 재료들을 손질하고 레시피를 따라 차분하게 조리한 음식을, 간이침대 발치에 놓인 넓지 않은 식탁 위에 예쁘게 차려 먹는다. 그리고 종종 본인들이 좋아하는 로컬 수제 맥주를 곁들인다. 특정 브루어리에서 맥주를 정기구독 할 정도로 맥주를 좋아하고 또 조예 깊은 이들 덕분에, 처음 그 집을 방문한 손님은 특별한 맥주 테이스팅을 경험하기도 한다. 네 사람이 둘러앉으면 나의 오른쪽 어깨와 옆 사람의 왼쪽 어깨가 맞부딪힐 것 같이 아슬아슬하지만, 그 물리적 가까움은 종종 심리적 친밀감으로 이어진다.



이 부부는 손님이 방문하면 거실의 간이침대가 아닌 안방의 침대를 내어준다. 방에서는 주로 잠만 자고, 깨어있는 동안의 생활은 거실 및 주방에서 많이 하기 때문에 그게 더 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옷가지가 모두 방 안에 있는 상황에서 손님에게 방을 내어주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나도 손님을 몇 번 맞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라이프 스타일에 정답은 없지만, 닮고 싶은 모습들은 존재한다.

지금의 이 신혼집에 살면서, 나는 내 취향이 아닌 것을 내 취향의 것으로 바꾸는 방법들을 연마했다. 우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햇빛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식물을 찾았다. (그간 나의 무지로 인해 죽어간 식물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차가운 유리 식탁은 그대로 두고, 대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컬러의 스트라이프 천으로 식탁보를 만들어 덮었다. 남편이 식탁보에 곧잘 음식을 흘려 기분을 언짢게 할 때도 있지만, 그만큼 자주 빨게 되니 위생적이다. 

밥을 먹을 때 중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 그릇에 담기는 음식과 정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혼집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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