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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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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Sep 23. 2016

Thrift Shop에 관하여

July 5, 2016

남편의 직장을 따라 무작정 미국으로 이사온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가족도, 친구도, 그 어떤 지인도 없는 이 곳에서 나는 매일매일을 고독하게 여행하는 기분으로 보내고 있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식비, 주거비, 주유비 등 대부분의 생활비를 지원해주기 때문에, 이제 갓 이십대 후반에 진입한 우리 부부에겐 특별한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 시댁과 친정 모두 한국에 있기 때문에 (비행기 직항을 타고 가도 최소 17시간을 가야 한다) 양가 경조사를 챙겨야 하는 어른으로서의 부담감도 덜하다. 그야말로 'stress-free' 상태. 한국에 있었다면 불가피했을 스트레스들로부터 자유롭다.


남편이 혼자 2년을 넘게 살았던 아파트는 어딘가 어수선하고 헛헛했다. 블라인드를 천장까지 걷어 올려도, 아침에 볕이 잠깐 고개를 들이밀 때를 제외하고는 집안이 컴컴했다. 평소 '안락한 집', '휴식이 되는 집'에 대한 주관과 환상을 갖고 있던 나는 어떻게든 이 집을 안락한 공간으로 꾸며야겠다는 결심을 세웠고, 집 근처 쇼핑몰에서 탐험을 시작했다.


여러가지 인테리어 소품과 무한한 DIY 재료들, 모던하거나 앤티크한 가구들. 샵의 종류 만큼이나 진열된 상품의 디자인, 소재, 크기, 용도도 다양했다. 그 수많은 상품들을 아우르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격. 하나같이 '이걸 꼭 사야하나...' 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가격들이었다. 인테리어 비용까지 남편 회사에서 지원해주진 않을텐데. 갓 결혼한 이십대 신혼부부에게 10만원, 20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에 상응하는 기회비용이 너무나 막대해서! (50만원이면 멕시코도 갈 수 있는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1년이 될 지 2년이 될 지 모르는 내 공간인데, 이렇게 황량한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며 마음을 붙일 수는 없었다. 혼자 고뇌하던 중 문득 떠오른 것. thrift shop. 한국에서는 '구제샵' 정도로 인식되는 그 곳. 검색해보니 집 반경 10km 내에만 10개가 넘는 샵들이 있었다. (미국에서 10km면, 차로 15분 이내 거리이므로 꽤 가까운 축에 속한다.) 그 중, 서비스와 가격, 규모 면에서 가장 좋은 후기들이 많은 샵을 내비게이션에 찍고 출발.


Beacon' s Closet 로고 (출처: Google 검색)


뉴욕에 잠깐 살았을 때도 thrift shop에 종종 가곤 했었다. 그 땐 학생 신분이라 주로 옷 쇼핑을 하러 갔었는데, 고가의 명품 브랜드나 유명 디자이너의 옷, 신발, 가방 등을 새 제품의 반값 이하로 살 수 있었다. 특히 Beacon's Closet 같은 샵에 가면 브루클린 힙스터의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해서 왠지 나도 쿨한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애틀란타의 thrift shop은 뉴욕만큼 세련되거나 쿨하진 않았지만 그 나름의 개성과 매력이 있었다. 한 가지 가장 큰 특징은 제품군이 '생활 밀착형'이라는 점이었다. 옷이나 신발은 물론, 책, CD, 주방용품, 가전제품(TV, 커피메이커, 헤어드라이기), 가구(테이블, 의자, 수납장, 소파)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살림살이는 다 장만할 수 있을 정도로 제품군이 다양했다. 특히 내가 갔던 샵은 Goodwill of North Georgia 라는, 조지아 주 전역에 스토어가 백 개도 넘게 있는 체인점(?)이었는데, 샵에서 판매되는 제품들이 모두 100% 기부를 통해 모여졌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전까지 내가 보아왔던 thrift shop은 소비자가 판매를 해서 물건이 모이는 형식이었다.) 기부를 받은 물건 덕분에 직원을 고용해 물건을 판매할 수 있고, 실업자를 대상으로 한 재취업 교육까지 실시한다.


(* 나중에 알고 보니 Goodwill Industries는 조지아 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 심지어 한국에까지도 매장이 있는 글로벌 조직이었다. 1902년 보스턴에서 시작된 비영리 단체다. Goodwill of North Georgia는 1925년에 시작되었다.)


35불치의 thrift shopping. 구두와 고데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매우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예쁜 유리 글라스 하나에 55센트, 취향저격 등나무 바구니가 1달러 55센트, 우리집에 꼭 맞을 신발장이 10달러 55센트. 몇 시간을 정신없이 쇼핑하다보니 어느새 카트가 가득 담기고, 결국 그 곳에서 35달러를 지불하고 나왔다. (응? 별로 안 나왔네?) 나중에 SNS에서 thrift shop과 관련된 컨텐츠들을 찾아보다가, 항상 thrift shop에서 산 옷만 입고 다니며 본인의 코디를 매일 촬영하여 업로드하는 한 여성까지 발견했다. 그 여성이 좀 특이한 사람인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그만큼 thrift shop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쯤 되니 한국 구제샵의 씁쓸한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재단의 '아름다운 가게', 구세군의 '희망나누미' 등이 꾸준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규모가 큰 샵은 많지 않고 유동인구도 적다. 종로5가 광장시장의 구제 코너는 호객 행위하는 젊은 상인들에 의해 번번히 발길이 돌려진다. 동묘 벼룩시장은 역사와 규모 면에서 가히 압도적이지만, 물건이 진열된 '샵'의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좌판에 무더기로 깔려있는 물건들 틈에서 살만한 물건을 가려내는 것은 온전히 손님의 몫이다. 그래서인지 동묘에는 쇼핑을 목적으로 간다기 보다 그 동네 특유의 분위기를 구경하러 간다고 하는게 더 적합할 것 같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다)


그나마 젊은 패피와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예쁜 옷 고르기 경쟁을 하던 곳이 서울 고속터미널 지하철 환승 통로에 있던 '빈 프라임(Vin Prime)'이라는 중고 옷가게인데, 몇 달 전 친구가 그 곳은 임대 계약 종료로 문을 닫았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왔다. 유행의 흐름을 따라 스타일이 바뀌는 고속터미널역의 수백 개 보세 의류 매장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바위처럼 꿋꿋이 컨셉과 철학을 지키던 곳이었는데. 유니크한 디자인이나 명품 브랜드 제품도 의외로 많아서, 치마를 거의 안 입는 내 동생이 플라워 패턴 롱스커트를 사고, 브랜드 안 따지는 내가 맘에 쏙 드는 버버리 코트를 사던 곳이었는데. 다시 문을 열었는지, 다른 곳으로 위치를 옮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넘치는 물자와 버려지는 예쁜 쓰레기들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미국의 막대한 일회용품 사용량이나 저급한(!) 재활용품 분리수거 수준을 생각하면, 여기에 대해서도 또 할 말이 많다. 어쨌거나 오늘은 thrift shop에 대한 생각을 풀어보았다. 물건의 가격(price)보다는 물건의 가치(value)에 집중할 때 더 건강한 자본주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헌 옷이든, 일회용품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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