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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Sep 11. 2016

나의 게으름에 대하여

August 2, 2016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 (본업은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일찍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 (1935)>이라는 저서에서, 우리가 소위 ‘근면성실’이라고 부르는 미덕은 평소에 절대 근면할 필요가 없는 소수 특권 계층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치라고 주장했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 향상 덕분에 모두의 여가시간이 조금씩 늘어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까지 여가를 누리던 소수 특권 계층이 본인들의 여가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일부러 노동을 이상화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노동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런 특권을 없애고 모두가 공평하게 여가시간을 조금씩 더 즐길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은 노동에 소모해버릴 뻔한 귀중한 에너지를 새로운 배움과 창작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러셀은 주장했다.


영어 단어 ‘school’과 ‘scholar’의 어원은 라틴어 ‘schola’ 또는 그리스어 ‘skhole’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각각 ‘intermission of work’와 ‘leisure’를 뜻한다고 한다. 아테네 시민들이 여가 시간에 즐겨하던 일이 광장에서 사람들 만나서 쓸데없는(otiose) 토론을 하는 것이었고, 그 토론을 통해 많은 걸 배웠기 때문에 나중에 그런 토론을 하는 장소가 ‘school’이 되었다고. 그리고 아마 ‘school’에서 잡토론을 꽤나 열심히 잘한 사람들은 ‘scholar’로 불리게 된거겠지. 딱히 볼 일도 없으면서 시장 어귀나 어슬렁거리던 한량들의 뜬구름 잡는 토론이 ‘school’과 ‘scholar’의 시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러셀이 모르진 않았을 것 같다.


출처: Google 검색


그러나 왠일인지 나에게는 존경하는 학자의 그럴 듯한 가설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 살아 숨쉬는 언어적 잔재도 그닥 와닿지가 않는다.


사실 나는 벌써 세 달째 자유로운 ‘leisure time’을 보내는 중이다. 간단한 집안일과 하루 한두 끼의 자발적인 식사 준비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의무도 책임도 없는 만 스물다섯의 (처녀 아니고) 유부녀. 남편은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해서 저녁 여섯 시쯤 귀가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하루에 총 10시간 정도의 여가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중 첫 두 시간은 주로 아침잠으로 사용된다. 결혼 전, 아침잠을 존중해 달라던 나의 간청은 롤(League of Legends)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남편 측 조건과 함께 무리없이 받아들여졌다. 아침에 일어난 남편은 나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최대한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간다. 


그렇게 푹 잠을 잔 뒤 마침내 기상한 나에게 남은 것은 8시간. 늦잠을 자느라 남편에게 제대로 된 아침밥을 챙겨주지 못하는 날이 많으므로 되도록이면 저녁은 직접 요리해서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준비해 놓는다. 이왕 하는거 제대로 하고 싶으니까 마트 가서 장도 보고, 재료 손질에, 조리, 상차림까지 다 하고 나면 족히 두세 시간은 지나간다. 남는 것은 5~6시간. 아침 겸 점심도 간단히 먹고, 다 먹은 것은 치우고, 간단히라도 집 정리는 해야 하니까 여기서 또 한두 시간 제외. 그러면 나에게는 평균 4시간의 ‘여가 시간’이 남는 셈이다.


밥 먹는 동안 어쩌다 미드나 예능이라도 한 편 켜면, 그대로 나의 여가 시간은 수동적 오락에 그치고 만다. 그런 날,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 “오늘은 뭐 했어?”라고 물으면, 나는 “음… 오늘 딱히 한게 없어.”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스스로를 향한 약간의 한심한 마음을 감추면서. 다행히 수동적 오락에 대한 유혹을 잘 넘기면, 그 다음엔 SNS의 관문이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피드를 쭉 넘기면서, 미국에서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인간관계 형성이나 사회 생활에 대한 내적 갈증을 해소하는 타임. 갈증 해소가 그다지 효과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매슬로의 욕구단계설 중 무려 3단계를 차지하는 사회적 욕구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 SNS를 계속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운이 좋아 일찍 (즉, 남편과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날에는 요가 스튜디오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거나, 시내의 Artist Center에서 진행되는 드로잉 세션에 다녀온다. 세 시간 동안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초집중을 하고 그림을 그린다. 집에 돌아오면 거의 방전 상태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수업 스케줄 상 요가와 드로잉을 둘 다 할 수 있는 날은 거의 없다. 대신, 요가를 다녀오면 정신이 맑아지기 때문에 혼자 카페에 가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브런치 타임과 저녁준비 시간을 고려하면, 카페에서 혼자 노닥거릴 시간도 두세 시간에 그치고 만다.


자, 도대체 어떻게 내가 이 여유시간을 통해 school과 scholar의 레벨에 필적하는 배움을 성취할 수 있을까.


잠을 줄이라고? 그럴 순 없다. 잠을 줄이면 여가 시간에 낮잠을 자버리거나 비몽사몽 상태로 안 하느니만 못 하는 무기력한 오락을 하게 되어 버린다.
저녁을 직접 만들지 말고 사 먹으라고? 아직 신혼 3개월 차에 불과한 나는, 요즘 요리에 대한 도전정신과 흥미가 한창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요리 실력을 레벨업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남편이 퇴근하고 난 이후에도 여가활동을 계속하라고? 좋은 옵션이긴 하나… 우리는 아직 신혼 3개월 차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직 마음 따로 몸 따로인 청춘인지라, 둘이 있을 때엔 개인적인 여가생활에 집중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결국 내가 여가 시간을 통해 배움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이번 생에는 어려운 것일까?
나는 너무 잠이 많은 타입의 인간으로 태어났다. 나이가 들면 잠이 확실히 줄어든다던데, 10년, 20년 쯤 지나면 좀 더 똑똑하고 총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이렇게 나의 게으름에 대해 고찰하며 앉아 있으니, 틈만 나면 ‘쓸데없는 토론’을 즐겼다던 아테네 시민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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