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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Mar 27. 2017

차 한 잔 하실래요?

밥과 차,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역학 관계


먹는 것(to eat)과 마시는 것(to drink)은 전혀 다른 종류의 행위이다. 입 안으로 들어가 목구멍 뒤로 넘어간다는 통과 의례 이외에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공유하는 지점은 거의 없다. 물론 한국어에서는 '먹다'라는 단어가 '마시다'를 포함한다. 가령 '물을 먹다, 술을 먹다'는 '물을 마시다, 술을 마시다'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반대로 '김치를 마시다, 삼겹살을 마시다'라고는 거의 말하지 않거나 '김치를 먹다, 삼겹살을 먹다'와 다른 의미의 표현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영어적 의미의 'to eat'과 'to drink'에 집중해서 생각해보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르다. 마시는 일은 씹는 행위와 거리가 멀다. 수프나 국을 마시거나 과일 스무디를 마시다가 건더기나 토핑이 있어 불가피하게 무언가 씹을거리가 생긴다면, 당신은 '먹고' 있는 것이지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입 모양과 자세에서 시작된다. 무언가를 먹을 때는 입을 크게 벌리고 몸을 앞으로 수그려야 한다. 젓가락이든, 숟가락이든, 포크를 쥔 손이나, 또는 맨손일 때라도, 음식이 도구에서 떨어지기 전에 입 안으로 넣기 위해 고개를 살짝 아래로 당기게 된다. 이 때 시선은 음식이 있는 곳, 이를테면 포크에 찍힌 스테이크 한 조각을 향하는데, 우주 공간에서의 식사가 아닌 이상 음식은 우리 얼굴의 27도 아래쪽 근방에 있어 항상 아래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부득이 밥을 얼른 먹고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은 아예 고개를 그릇에 처박듯 가까이 두고 먹기도 한다.


To Eat


마시는 행위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병째 마시든, 컵으로 마시든, 심지어 빨대를 사용할 때에도, 우리는 액체가 입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그맣게 입을 오므린다. 마시는 양이 늘어나거나 용기의 바닥이 드러날수록 목은 자연스레 뒤로 꺽이게 되는데, 이 때 사람들은 눈동자를 하늘 위로 치켜뜨거나, 아니면 최소한 정면을 바라보게 된다. 음료를 들이켜는 순간, 마주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거나 창 밖의 하늘과 나무와 새를 힐금이며 곁눈질하게 되는 것이다.


To Drink


이런 속성 때문인지 두 행위는 마주앉은 상대방과의 의사소통 방식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입 안의 음식을 씹고 삼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므로, 먹으면서 동시에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기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다. 흥미로운 주제의 화두가 던져져도, 우물거리는 입으로 "아, 잠깐만"을 외친 후 어색한 몇 초가 흐른 뒤에야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음식을 빨리 삼켰다 해도, 혹여 입 안이나 잇몸 사이에 잔여물이 남아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대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놓치기 일쑤고 맞장구를 칠 타이밍도 빗나가고 만다.


나는 특히나 밥을 천천히 먹는 편이다. 습관 상 빨리 씹고 빨리 삼키는게 남들보다 조금 더 어렵다. 그래서 친한 친구나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를 제외하고는 편하게 이야기하며 밥을 먹기가 쉽지 않다. 연락이 뜸하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든지, 이제 막 친해져서 서로에 대해 묻고 답할게 많은 상대, 또는 말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어려운 관계의 사람-예를 들면 처음 만나는 남편의 직장 상사-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는 밥보다도 대화를 나누는 일이 더 중요하므로 종종 밥을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 음식이 식어버려 맛이 없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적정 식사 시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배를 채우지 못해 남은 음식을 집에 싸들고 가서 전자렌지에 데운 후 혼자 식탁에 앉아 먹게 된다. 밥을 희생하고 얻은 대화의 성과나 관계 진전이 크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만은 않겠지만, 눈 앞에 음식을 두고도 배가 고픈 것은 서러운 일이다. 씹는 것도 삼키는 것도 빨리빨리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서러움을 알까?


반면, 차 한 잔이나 커피 한 잔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여유롭고 순조로우며, 때로 유쾌하기까지 하다. (참고로 몇몇 차가운 음료는 여기서 제외된다. 아이스 라떼는 얼음이 적당히 녹았을 때 제일 맛있고, 맥주는 제일 차가울 때 벌컥벌컥 마시는게 그에 대한 예의다.) 조급한 사람은 제대로 된 차를 마실 수 없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면서 무심코 마시는 커피는 커피로서의 커피가 아니라 카페인 음료의 일종이다. 차가 우러나는 3분을 기다리는 일은 여유있는 사람만이 오롯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이다. 이런 여유는 절대적인 시간의 잉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쌓여있는 일과를 잠시 접고, 3분의 짬을 내어보자. 물론 3분이 30분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음은 따뜻한 차를 마시는 과정이다.


  1. 기호에 맞게 차 또는 커피를 준비한다.

  2. 뜨거운 물을 붓는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린다면 조금 더 신경써서 붓는다.)

  3. 뜸을 들인다.

  4. 향을 음미한다.

  5. 후후- 불어 호로록 넘겨본다.

  6. 조금 더 교양 있어 보이고 싶다면, 한 김 식은 뒤 소리나지 않게 한 모금 삼킨다.

  7. 이 때 상대방에게 찡긋 눈웃음을 지어주면 금상첨화.


차를 마시는 과정은 단순하고 깔끔하다. 식으면 뜨거운 물을 더하면 되니 급하게 마실 것 없고, 남긴다고 해서 배가 고플 일은 아마도 없을테니 조금씩 마셔도 된다. 갑자기 음료를 엎지르지 않는 이상, 마시는 행위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대화가 끊길 염려도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밥 약속보다 차 약속이 더 이득인데, 살다보면 또 다른 여러가지 요인들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어차피 먹어야 하는 밥이니, 그 시간에 오랜만에 A도 만날 겸 같이 밥을 먹어야지'하고 타협을 하게 되어버리고, 인간은 오늘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리 다음 주 토요일에 차 한잔 같이 할래?"라고 먼저 제안해주는 친구의 연락이 반갑다.






<별책부록: 재미로 보는 성향 테스트>


Q. 음료를 실외로 가지고 나가야 하는 상황. 당신은 어떤 용기에 담나요?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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