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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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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a Kim Jul 20. 2017

할머니, 내 할머니

사랑하는 할머니를 기억하며.

"이거 느한테만 주는기다이. 이모한테는 말하지 마래이."

할머니댁을 나설 때면 항상 듣던 말이었다.


할머니댁은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술상리. 가구 몇십 채가 전부인 시골이다. 지리산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논도 있고 밭도 있고 바다도 있는 풍족한 동네다. 동네 중간 길을 따라 개천이 흐르고, 아마도 그 개천의 물을 댄 논들이 집들 앞뒤로 펼쳐져 있다. 엄마는 지금의 할머니댁에서 나고 자랐다. 2남 5녀 중 막내다. 엄마의 이름은 '선' 자, '옥' 자인데, 그 이름을 짓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지나가던 스님께서 이 아이는 '심이'라고 만 번을 불러줘야 복이 온다고 했다. 그래서 외갓집에서 우리 엄마 이름은 '심이'다. 술상리에는 학교가 없어서, 엄마는 옆 동네 양포리의 양포초등학교를 나왔다. 지금의 양포초등학교는 폐교가 된지 오래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다 도시로 나가버려 학교를 다닐 어린이가 없어서이다.


눈을 감으면 할머니댁 동네 풍경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석류 나무가 심어진 할머니댁 앞마당을 지나 동네 중간 길로 걸어나오면 옆집 아저씨가 키우는 소 우리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소의 까만 눈을 잠깐 들여다 본다. 꼬리로 엉덩이를 터는 소의 똥 냄새가 못 견뎌워질 때쯤, 오른쪽으로 틀어 길을 따라 쭉 내려간다. 간혹 동네 어르신들을 마주쳐서 인사를 드린다. "누고?" 물으면, "심이 딸이예요." 대답한다. 겨울철에는 할머니, 아주머니 할 것 없이 다들 집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석화 한 망태기를 옆에 놓고 굴 (현지 사투리로는 '꿀') 껍데기를 까고 계신다. 할머니댁 앞마당에서 이모들과 엄마가 깐 자연산 생굴을 나도 참 많이 먹었다. 입 안에 넣으면 미끌하게 찌릿한 바다향이 터지는 굴을, 어렸을 땐 그렇게 먹기 싫어서 아빠랑 매번 먹네 마네 실랑이를 벌였었다.


굴 까는 아주머니들을 지나 길이 왼쪽으로 꺾이기 직전까지 걸으면, 이제 더 이상 장사를 하지 않는 동네 유일의 슈퍼가 나온다. 엄마에게 언니 오빠들이 많은 덕에, 나에게도 사촌오빠들과 사촌언니들이 여럿이다. 그 슈퍼에서 언니 오빠들이 과자랑 아이스크림을 참 많이도 사주었다. 다같이 할머니댁 작은방 침대에 걸터앉아 놀다가, 누구 한 명이 간식을 먹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면 언니 오빠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간식 내기를 했었다."현화는 뭐 먹을래?" 물어보면, 말 없이 앉아 멍 때리던 나는 "아무거나." 대답하곤 했다. 사실 내가 원하는걸 먹는다기 보단, 슈퍼에 있는 것 중에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걸 고르는 거였다. 똑같은 쮸쮸바인데도, 시골에서 먹는 도시의 맛은 어쩜 그리 달콤하던지.


슈퍼마켓에서 왼쪽으로 꺾어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하얀 시멘트 길이 까만색 아스팔트 길로 바뀐다. 인도는 따로 없으므로, 찻길을 따라 사람도 걸어간다. 양옆으로 늘어선 논에서는 아릉아릉 벌레가 운다. 삼십 분쯤을 걸어 나가면, 얕게 바닷물이 들고 나는 해안이 나온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아기 시절, 나는 엄마만 없으면 죽어라 울어대는 세상에서 제일 까다로운 밉상이었다. 어느 날 엄마 아빠가 큰이모에게 나를 맡겨놓고 외가 식구들과 바닷가에 놀러 갔는데, 내가 자다 깨서 엄마가 없다는걸 알고 죽어라 울어댔다고 한다. 말도 못 하는 아기가 숨이 넘어갈듯 울어대니 덜썩 겁이 난 이모가 할머니댁에서 바닷가까지, 나를 안고 냅다 달리셨더랬다. 지금도 큰이모는 그 이야기가 나오면 질색을 하신다. 


바닷가에 도착해서 해안선을 바라본다. 사천시와 남해군의 복잡한 해안선과 크고 작은 섬들에 가로막혀 탁 트인 수평선을 볼 수는 없지만, 안락하고 편안한 느낌이 있다. 큰 파도 대신 잔잔한 포말이 인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그 바닷가에 물이 빠지면 꽤 넓은 뻘밭이 드러난다. 거기서 이모들, 동생들과 쏙 (표준어로는 '갯가재'. 새우랑 비슷하게 생겼다.) 잡이를 한 적이 있다. 뻘밭 중간 중간 뽕뽕 뚫린 구멍에 짭짤한 된장을 강낭콩 한 알 만큼 넣으면, 바닷물이 든 줄 알았는지, 고소한 향 때문인지 쏙이 슬그머니 기어올랐다. 그 때 재빨리 붙잡으면 성공이다. 그 날 저녁엔 쏙을 넣은 된장국을 끓여먹었다.



할머니는 작은 삼촌과 함께 사셨다. 작은 숙모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십오 년 전쯤 추운 겨울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주무시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특별한 지병이나 사고는 없었다. 어른들은 할아버지가 아프지도 않고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는 '잘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을 막 지나고 있었는데, 참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쌀 농사도 지으시고 밭 농사도 지으셨다. 논은 집 근처, 슈퍼 바로 앞에 있었고, 밭은 차로 오 분, 걸어서 이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그 밭은 말이 밭이지 사실은 동산이나 다름없었다. 언덕배기 하나가 다 할머니의 밭 무대였다. 그 곳에는 허름하지만 주방과 욕실이 다 갖춰진 집 한 채가 더 있었고, 한 때 활발히 사용되었을 소 목축장도 널찍했다. 할머니네 밭의 주요 작물은 감나무였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엔 단감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우리 집은 해마다 단감이 주요 과일이었다. 가을 수확 때부터 먹기 시작해서 한겨울 꽁꽁 얼린 홍시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은 단감도 홍시도 아니다. 단단한 단감과 무른 홍시의 중간 정도로 익은 감이 제일 좋다. 한 입 베어물면 잘 익은 복숭아처럼 과즙이 줄줄 흐르지만, 아삭하고 부드러운 식감은 둘 다 가지고 있는 정도로 알맞게 익은 감. 당도는 물론이고 홍시에는 없는 상큼한 맛도 있어서 하루 저녁에 두세 개씩 먹어치우곤 했다.


가을에 종종 엄마 아빠를 따라 할머니댁 감을 따러 가면, 감나무를 타는 엄마의 모습이 신기했다. 외갓집에 가면 엄마는 나보다 어려졌다. 목소리는 한 톤 높아졌고 동작은 더 커졌다. 잔뜩 신이 난 중학생 소녀처럼, 본인이 아는 풀 이름과 나무 이름을 우리에게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나는 덩달아 신이 나서 괜히 더 궁금해했다. 엄마는 조금 위험하다 싶은 일도 망설이지 않고 해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감나무에 발을 디디고 선 엄마를 올려다 보았다.


감나무 밭 옆에는 매실 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여름에 매실을 따다 매실청을 담그면 일년 내내 집에서 시원한 매실음료를 즐길 수 있었다. 그것은 나와 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였다.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콜라나 사이다 대신, 꼭 얼음에 매실청을 타다 마셨다. 나중에 마트에서 파는 매실음료를 우연히 먹어보았는데 설탕 맛만 나고 맛이 없었다. 나중에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도, 엄마는 서울 자취방으로 1.5리터짜리 플라스틱 병에 담은 매실청을 보내주셨다. 동생은 탄자니아에 인턴을 갈 때 매실청 한 병을 챙겨갔다. 내가 미국에 살다 탄자니아에 놀러갔을 때, 그녀는 이거 오랜만에 먹어보라며, 아껴둔 매실청으로 시원한 매실음료를 만들어주었다.


할머니네 밭에는 없는게 없었다. 배추나 무, 마늘과 고추, 각종 쌈 채소와 나물, 고구마와 감자, 심지어는 키위 같은 수입 품종 과일까지 다 있었다. 할머니댁에 가면 나와 동생들은 아침 늦게까지 자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다시 방에 들어가 TV를 보다가 낮잠을 자고, 오후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게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엄마와 할머니는 밭에 가서 제철 채소를 수확하거나 밭을 가꾸셨다. 나는 기분이 내킬 때 한 번씩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가 마늘쫑을 뽑거나, 상추를 뜯거나, 고추를 땄다. 탐스럽게 늘어져 볕을 쬐는 늙은 호박도 구경했다. 노란 속살을 채썰어 밀가루와 반죽한 뒤 부친 호박전을 나는 정말 좋아했다. 달고 고소한 호박의 향기와, 갓 구워진 전의 바삭함과, 참깨 뿌린 초간장의 시콤하던 맛.


할머니댁은 바다가 가까우니 해산물도 풍부했다. 가을에는 전어 축제가 바로 옆 동네에서 열렸다. 덕분에 잔뼈가 많은 전어를 꼭꼭 씹어먹는 그 고소한 맛을 어렸을 때 부터 알았다. 굴, 해삼, 멍게 같은 해산물도 많이 먹었다. 갓 회를 친 해삼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꼬들꼬들하고 쫄깃한 식감이 재미있었다. 할머니는 미역국도 생선살을 넣어 끓였다. 소고기 미역국의 기름진 맛과는 다르게 개운하고 풍부한 바다 맛이 났다.


 

지금은 남해고속도로가 6차선, 8차선으로 확장되어 김해에서 하동까지 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지만, 어렸을 때는 외갓집에 가는게 꽤 큰 일이었다. 한 번 갈 때 차를 서너 시간 타는 것은 기본이었다. 고속도로 정비가 잘 안 되어 있었던데다가, 명절 교통 체증까지 더해져 내왕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큰 맘을 먹고 가면, 하루 정도 있다가 다음 날 새벽 다섯 시에 잠도 덜 깬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차가 막히기 전에 일찍이 출발해야 그나마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트렁크는 물론이고 우리 삼남매가 앉은 뒷좌석 발치, 엄마가 앉은 조수석 발치에까지 짐이 빽빽했다. 다섯 식구가 먹을 쌀 한 포대, 부산 친가 식구들과 나눠먹으라고 할머니가 챙겨주신 각종 채소들, 생선, 해산물이 그득했다. 엄마만 구별할 수 있는 검은 봉지들도 많았다. 어떤 봉지에는 떡과 명절음식들이, 또 다른 봉지에는 얼린 조기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짐을 실었는데도, 할머니는 꼭 마지막에 냉장고에 숨겨둔 검은 봉지 하나를 더 챙겨주셨다. 엄마를 가리키며 막내한테만 주는거라는 귀여운 멘트와 함께. 가는 길에 차에서 먹으라며 쌀강정과 사과와 배도 하나씩 넣어주셨다. 마지막으로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차 뒷좌석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볼 때, 멀리 손을 흔들던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렇게 내가 자라 성인이 될 때까지, 또 종종 그 후에도, 나는 늘 할머니의 손을 거친 음식을 먹었다. 해외에 나가 있거나 갑자기 쌀이 동난 경우가 아닌 이상, 나는 쌀을 사먹어 본 적이 없다. 우리집 김치는 전부 할머니네 밭에서 수확한 배추로 담갔다. 엄마가 장롱 면허를 탈출하고 고속도로 사정이 나아져 하동까지 오가는 일이 수월해지고 나서부터는, 엄마가 외갓집에 방문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우연찮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가 그 즈음인 것 같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가서 할머니와 작은 삼촌의 농사일을 도와드리기도 하고, 부산 사는 이모랑 같이 가서 김장을 담그기도 했다. 장이나 참기름 같은 것들도 어릴 때는 할머니가 주시는 것들을 먹었는데, 언젠부턴가는 엄마가 마트에서 사온 것들로 바뀌었다. 모든 걸 다 직접 키우고 손질하는게 힘에 부치셨을까. 떨어지는 농산물 가격 때문에 그냥 사다 먹는게 더 낫다고 판단하셨을까.



할머니댁이 아닌 곳에서 할머니를 뵌 기억은 많이 없다. 십 년 전쯤, 부산 친할머니와 하동 외할머니를 함께 모시고 우리 가족끼리 국내 어딘가로 여행을 갔던 기억이 있다. 두 분 할머니 모두 할아버지를 먼저 여의셨으므로, 외롭고 심심하실 어머님 두 분을 생각한 아빠의 기획이었다. 그 때 아빠는, '이렇게 두 분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 갈 일이 또 있겠냐' 하셨는데, 나는 속으로 아빠가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다. 진짜 그게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한 번은 할머니가 우리 집에 며칠 머무르셨던 적도 있다. 친할머니도 아니고,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신건 내 기억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때 할머니랑 같이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갔었다. 재래 시장이나 동네 슈퍼에만 가봤지 그렇게 큰 대형마트는 처음이셨던 우리 시골 할머니는, 수산 코너에서 갈치를 주문할 때 이건 내가 사마, 하시며 손지갑을 꺼내셨다. 키만 컸지 철이 없던 나는, 할머니 여기는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마지막에 한꺼번에 다 계산하는거예요, 무안한 핀잔을 드렸다. 그 때 조금 더 상냥하게 설명해드릴 수 있었는데. 시골에는 없는 다른 것들도 하나하나 더 많이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할머니를 떠올리면, 할머니에 대한 기억보다는 할머니집에서 먹은 음식, 할머니집 동네의 풍경, 실개천이 깨끗했을 적에 그 곳에서 물놀이를 하던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마당에 피워놓았던 모닥불과 그 그을음 냄새도 강렬하다. 내 인생의 중요한 장면 속에 할머니는 안 계셨다. 생일날에 할머니로부터 축하를 받은 기억이 없다. 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외할머니가 아닌, 부산 친할머니가 오셨다. 심지어 내 결혼식에도, 나의 끈질긴 부탁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는 끝내 참석하지 않으셨다. 나이 든 사람이 그런데 가 있으면 보기 안 좋다는, 내 머리와 연륜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다.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할머니 어떤 거 좋아하셨어?"

나는 잠깐 고민했다. 할머니가 어떤 걸 좋아하셨는지 생각이 안 났다. 할머니의 손녀로 이십 몇 년을 살았는데, 나는 할머니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가.


할머니는 막내 딸 심이의 첫째 사위를 딱 한 번 밖에 보지 못 하셨다. 내가 미국에 오고 나서는 두세 번 정도 명절 인사 차 전화를 드린게 다였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셨으므로 전화 귀가 어두워 질문이나 농담을 드려도 잘 알아듣지를 못 하셨다. 그마저도 외국에서 전화하면 요금이 많이 나온다며, 이야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얼른 전화를 끊으라 하셨다. 작년 여름, 미국 신혼집에 놀러오신 엄마는, 외할머니가 너 필요한거 사라고 주셨다며 오십만 원을 환전해서 갖다 주셨다. 쌀 농사, 감 농사 지어 번 돈과 자식들이 챙겨드린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모으셨겠지.



할머니께서는 한국 시간으로 2017년 7월 15일 토요일 아침 7시 경에 별세하셨다. 우리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미국 시간으로 아직 금요일 밤이었다. 주말 인사로 부모님께 안부 문자를 드렸는데, 아빠가 오늘은 슬픈 소식이 있다고 하셨다. 전화 너머로 아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이 빠져 아빠, 뭐라고? 를 반복했다. 음절 사이로 목소리가 갈라지고 울음이 터졌다.


할머니는 별세하시기 하루 전날 갑작스럽게 몸에 통증이 와서 병원에 가셨다.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다시 집에 돌아왔는데, 한밤중에 다시 통증이 와서 응급실에 가셨다. 종합병원은 싫다 하셔서 사촌언니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사천시의 한 병원에 입원하셨다. 췌장암이라고 했다. 원래 췌장암이란게 통증이 엄청난건데 그 전에는 아프신 적이 없다는게 신기하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엄마와 이모는 할머니가 복이 많으셔서 아프지도 않고 잘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을 하기에는 나의 슬픔이, 내 가족의 슬픔이, 할머니를 알고 지낸 모든 사람들의 슬픔이 너무 컸다. 그 급작스러운 슬픔을 온전히 들어내고, 할머니의 입장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사랑하고 성숙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는걸까. 결혼을 하고 나서 나는 내가 제법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더 철이 들어야 하는걸까.


돌이켜보니, 할머니는 나의 젖줄이었다. 내 엄마의 엄마이기도 했지만, 이십 몇 년 동안 내가 먹은 몇 만 그릇의 밥의 근원이기도 했다. 머리만 컸지 제대로 아는게 하나도 없는 손녀딸은, 할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같이 모셔다 드리지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늦게라도 가겠다고 했지만, 너네가 올 때 쯤이면 문상은 끝난다고, 엄마 아빠는 한사코 만류했다. 원래 할머니는 남 고생스러운 일은 절대 원하지 않는 분이시니, 너네가 오는 것도 분명히 말리셨을거라고, 엄마는 억지스럽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여동생은 탄자니아에서, 서로 전화기를 맞대고 엉엉 울었다. 9월 전역을 앞두고 있던 남동생은 연평도에서 급히 내려와 그날 밤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엄마와 아빠가 느낄 슬픔의 크기는 짐작도 하고 싶지 않다.



기억하기 위해 쓴다. 잊지 않고 싶어서 글을 쓴다. 내가 보고, 듣고, 먹고, 맡고, 느꼈던, 할머니와 연관된 모든 것들을, 할 수만 있다면, 다 써놓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볕에 타서 까맣고 주름진 얼굴, 깡마른 몸에 걸친 몸빼 바지. 가끔 통역이 필요하던 할머니만의 사투리, 높고 단단한 톤의 목소리. 할머니를 껴안을 때 나던 살냄새, 그 살냄새가 배인 할머니의 이불. 몸을 쭈그리고 앉아 가마솥에 불을 때거나 밭을 매던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댁 뒤뜰의 대나무 밭 소리. 나에게만 슬쩍 챙겨주시던 빨갛게 벌어진 석류 열매. 고무신을 신고 '끽' 아픈 소리를 내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 앞마당에 널어놓던 빨래. 빨래가 빛과 바람을 맞이하던 모양...


할머니, 볕이 좋은 곳에서 오랫동안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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