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온지 5일째 되는 날이다. 어제는 저녁 8시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었다가, 새벽 3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각)에 눈이 뜨였다. '눈이 뜨였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게, 나는 아침 6시, 7시 같은 동틀녘에 일어나고 싶었지만, 의식에 의해 조종당하기는 커녕 의식을 지배하는 나의 생체리듬이 이 시간에 내 의식을 현실세계로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지난 4일 간의 취침-기상 시간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그 전에는 퇴근 한두 시간 전부터 비몽사몽인 상태로 있다가, 저녁 5-6시가 되면 밥을 안 먹거나, 먹더라도 겨우 한두 숟갈 밀어넣고나서 '기절'해버렸다. 그러고는 밤 12시나 1시 쯤에 나도 모르게 눈의 뜨이고, 새벽 4-5시가 될 때까지 총명한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가 다시 한 두 시간을 자는 식이었다.
시차적응에 보기 좋게 실패하고 나서, 나의 혼란한 생체리듬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자 어제 저녁에는 달리기를 나갔다. 퇴근 직후였지만 해는 벌써 지고 사방은 컴컴했다. 왠일인지 이번 겨울의 뉴저지는 영 춥지가 않아서, 여러 겹 껴입은 웃도리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나이키 런 클럽(NRC) 앱을 켜서 '25-minute Easy Run'을 실행했다. 작년 여름에 몇 번 들었던 익숙한 코치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달리는 첫 5분은 항상 힘들다. 몸도 무겁고 다리도 무겁고 몸의 양 옆에서 흔들리는 팔도 어색하다. 그러다 10분 15분이 되면 슬슬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고, 20분께에 머리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고 다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것 처럼 스스로 움직인다. 마침내 25분에 다다라서는 다리에 피곤한 감각이 돌아오면서 마무리된다. 이 피곤한 감각은 '멈출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달리기가 끝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컴포트 존(Comfort zone)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컴포트 존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말을 내뱉고 나서도 스스로 움찔했다.
'아니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한국에 있는 동안, 또 미국으로 돌아온 요 며칠 동안, 가족들, 친구들과 2세 계획이나, 내 집 마련, 커리어 계획 같은 주제들에 대해 워낙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혹은 잊고 지냈던) 한국 사회 특유의 '빨리빨리', '성과 중심', '건설적이고 생산적으로' 같은 관념들을 오랜만에 마주하다 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머리 속에는 당혹스러운 의문이 남았다.
'앞으로 5년 10년 동안 내 삶이 지금과 비슷한 양상으로 쭉 계속된다면, 그건 과연 '좋은' 삶의 방식일까?'
월세든 자가든 적당한 집에 살면서, 규칙적인 시간에 출퇴근 하며 돈 벌고, 남는 시간에 원하는 취미생활을 즐기고, 특별히 가족을 늘릴 일도, 줄일 일도 없는 삶. 정말 이상한 건, 이전에는 이런 삶의 방식이 꽤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다. '안락하고 평화롭고 소소하게 행복하게 소중한 나의 일상'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어제 달리기를 마친 후 신호등 아래에서의 내 마음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지루하고 반복적이고 재미없는 생활'로 느껴진 것이다.
내가 워낙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전형적인 팔랑귀 타입), 이번에 친구들을 만나면서 여러가지 좋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석박사 공부를 하거나 육아를 하는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깊게 관계 맺는 친구, 주변의 문제에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실천하는 친구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과연 나는 저들처럼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나'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게 아닐까.
그렇다고 2세 출산이나 내 집 마련 같은 특정 행위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징표'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스스로에게 도전적인 과제를 내줘야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