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잃어버리다. #2-1

잃어버린 것,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by 기린이다

눈처럼 하얀 고양이,

그래서 너의 이름은 설이



창밖에 눈이 쌓일 때,

그리고 가끔 네가 잠잘 때마다 몸을 둥글게 말아놓은 것처럼

둥근 보름달이 떴을 때 나는 네가 생각나.

네가 앉아있던 창틀, 네가 좋아하던 통조림, 네가 숨어서 숨바꼭질하던 커튼 뒤, 이불속, 예전에 입었던 옷에 묻어나는 너의 곱고 흰 털, 너는 아직도 내 옆에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너를 볼 수 없구나. 설아,


나는 아직도 그 날을 후회해. 바쁘다는 핑계로 너와 누리를 잠시 엄마 집에 맡겨놓았던 그 날을 말야. 엄마 아빤 너희를 무척 반기셨어. 너희도 우리 엄마 아빠를 꽤 마음에 들어했었고. 그래서 나는 좀 안심했었어. 빨리 미뤄놓은 일을 처리해야겠다 싶었어. 내가 너희를 맡기고 돌아서는 그때, 내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비비던 너. 하필 검은 바지를 입었는데 너의 하얀 털이 귀찮다고 나는 금세 너를 떼어놓았지.

그대로 너를 무릎에 올려 안아줄걸.

며칠만 참으라고 다정하게 말해줄걸.

나도 얼굴을 쓰다듬어줄걸.

너의 눈을 조금만 더 바라볼걸.


일은

예정보다 더디게 흘러갔어.

너희를 데리러 갈 시간이 점점 늘어졌어. 미안해. 나도 바빴으니까. 그날도 나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어. 너희가 없는 빈자리가 매우 허전했지만 나는 너무 피곤했어. 겨우 몸을 씻고 냉장고에 뭔가 먹을 게 있나 하고 열어볼 뿐이었어. 냉장고 한켠에는 너를 엄마 집에 보내기 전에 먹이다 남긴 통조림 캔이 남아있었어. 잠시 너와 누리를 생각했지만 그저 막연히, 너흰 그저 잘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어. 그리고 뭔가를 우물거리면서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다가 잠이 들면 또 내일 일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그런 시간이었어. 그런데 그 새벽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던 거야.


“엄마 왜? 무슨 일이야?”


엄마는 내 목소리를 듣고도 한참을 아무 말을 안 했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겨우 무슨 소리가 들렸어.

엄마는 울고 있었어.

엄마는 내게 말했어. 너의 죽음을......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제대로 좀 이야기 좀 해봐. 애가 왜 죽어. 갑자기. 병원은? 병원은 가 봤어? 애 얼굴색은? 숨은? 숨은 쉬어? 안 움직인다니? 내가 가볼게 기다려!”

믿을 수가 없었어. 네가 죽는다는 거 말이야. 가봐야 했어. 너를 보러. 우리 집에서 네가 있는 우리 엄마 집 까진 두 시간. 너를 보러 가는 내내 나는 엄마한테 다시 전화가 오길 바랬어. 우리 딸,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애가 잠깐 아프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다고, 오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출근 잘 하라고, 그렇게 전화가 오길 바랬어.


운전하는 내내

나는 너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 전래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손가락을 깨물어 너의 입에 피를 흘려 먹이면 네가 다시 살아날까? 너를 꼭 안아주면 너는 다시 살아날까? 너를 데리고 병원을 가면 될까? 전기충격기가 있으면 될까? 아니야 엄마가 잘못한 걸 수도 있어. 네가 자는 데 너무 조용하니까 엄마가 죽은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너는 원래 얌전히 자잖아. 너를 병원에 데려가면 의사 선생님이 웃으면서 얘기할지도 몰라. ‘이 녀석이 많이 피곤했나 봐요. 가끔 고양이들 중에서 이런 경우가 있긴 해요. 놀라지 마세요. 곧 잠에서 깰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그럴지도 몰라.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나는 너에게 도착했어. 그리고 너를 봤어. 너는 마치 잠이 든 것 같았어. 내가 불러도 둥글게 몸을 만채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자던 그런 모습 말야.

“설아, 일어나. 엄마 왔잖아.”

내가 너를 불러도 너는 대답이 없었지.



설아,

얼마나 울었니? 눈에 눈물자국 좀 봐. 내가 닦아 줄게. 그러니까 나 좀 볼래? 설아, 뭔가 먹으면 아픈 걸 먹었니? 입에 뭐가 묻었잖아. 내가 닦아 줄게. 그러니까 ‘옹’ 하고 한 번만 울어줄래? 응?

너의 눈엔 이제 더 이상 내가 보이지 않는 걸까? 너의 귀는 이제 더 이상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까? 너는 이제 나를 볼 수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걸까? 아니, 이젠 내가 너를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된 것일까?



설아,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니? 그렇게 아팠는데, 그렇게 무서웠는데 오지 않는 나를 너는 원망했니? 서운했니?


설아......


나는 믿고 있어. 나중에 나도 죽어 저 먼 나라로 가면 사랑했던 사람들, 사랑했던 동물들이 모두 나를 마중 나온다는 걸 말야. 설아, 엄마는 조금 이따 갈게.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잃는다는 것은

때론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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