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잃어버리다. #03

잃어버린 것,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by 기린이다

롤러스케이트 언덕


우리 동네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언덕이 많은 편이었어. 그중에 골목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언덕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그 언덕을 ‘청룡열차’라고 불렀어. 스케이트보드에 쪼그려 앉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언덕을 내달리면 잠깐이나마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 긴 언덕을 바퀴가 달린 거라면 뭐든지 타고 놀았어. 언덕까지 힘차게 걸어 올라가서 돌돌돌돌 거리며 언덕을 내달리는 느낌. 그 순간만큼은 청룡열차 부럽지 않았지.


우리는 항상 그 언덕에서 놀고 싶었지만 그 언덕은 쉽게 놀 수 있는 곳은 아니었어. 우선, 언덕에는 주차된 차가 없어야 했어. 차 때문에 골목의 폭이 좁아지면 청룡열차를 끝까지 타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거든. 중간에 방향이 조금만 틀어져도 주차된 차의 범퍼나 바퀴에 부딪히기 일쑤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언덕 맨 꼭대기에 살고 있는 집주인 할아버지. 우리는 집주인 할아버지가 무서웠어. 우리는 청룡열차를 탈 때마다 언덕 꼭대기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렸는데 집주인 할아버지는 우리가 시끄럽다고 쫓아내곤 했거든. 할아버지는 우릴 때리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어른이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우린 너무 무서운 일이라서 할아버지가 문을 여는 소리만 들려도 도망가기 일쑤였지.


그런데 집주인 할아버지도 우리에게 크게 뭐라고 하지 않는 날이 있었어. 그건 바로 눈 오는 겨울이야. 집주인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른들은 대부분 춥다고, 눈이 귀찮다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거든. 그땐 눈이 내리면 정말 펑펑 내렸어. 동네 여기저기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먹는 친구, 발을 빠르게 구르며 눈을 튕겨내서 구름을 타고 다니는 친구, 집에서 연탄을 가져와서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드는 친구들. 우리는 눈이 오면 다들 그렇게 놀았어. 그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역시 그 청룡열차 언덕이었어. 눈 쌓인 언덕은 금세 눈썰매장이 되니까 말이야


눈이 적당히 쌓이면 우리는 저마다 탈만한 것들을 가지고 재빨리 그 언덕에 모였어. 어른들은 언덕에 으깬 연탄이나 모래를 뿌려서 우리를 못 놀게 하니까 얼른 가서 자리를 잡아야 했지. 서둘러서 언덕에 가 보면 친구들은 정말 별에 별걸 다 들고 와. 김장할 때 쓰는 빨간 고무대야라던가 우유 상자나 쌀 포대, 심지어 공사장에서 쓰다 남은 합판까지 뭔가 탈만한 건 다 언덕으로 가지고 왔어. 우리는 하나둘씩 각자의 탈것을 실험해봐. 어떤 건 일자로 나가질 못하고 또 어떤 건 뭔가에 걸려 데굴데굴 구르고 그리고 또 어떤 건 가다가 멈춰버리곤 했지. 언덕 끝까지 신나게 내려갈 수 있는 탈것은 드물었어. 그렇게 우리는 언덕에서 넘어지고 구르면서 놀았지. 어떤 것이 제일 좋은 탈것인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아. 그렇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정말 재미있었어. 한참을 놀다 보면 잠바나 바지 여기저기에 달라붙은 눈 때문에 우리는 하얀 북극곰. 집에 가서 혼나기 딱 좋은 북극곰이 될 때까지 놀았지.


나는 이 언덕이 참 좋았어. 이사 가기 전 날에도 마지막으로 한 번, 또 마지막으로 한 번을 수없이 되뇌면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놀았거든. 그런데 막상 이사를 가고 나니까 그 언덕이 그립거나 하진 않더라고. 새로운 동네에선 새로운 놀거리가 있었고 또 학년이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동네에서 뛰어노는 일은 점점 유치한 일이 되었지.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동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못마땅한 어른이 되어버렸어.

얼마 전에 나는 옛 동네를 찾아가 봤어. 찾아갈 일이라곤 전혀 없지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하나 없지만 나는 찾아가 봤어. 버스를 타고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언덕에서 쪼그려 앉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를 봤거든.

‘아직도 저런 걸 타는 아이가 있나?’

‘아니, 애초에 저런 걸 아직도 파나?’


버스가 앞으로 계속 가는 동안 아이의 모습은 점차 사라졌지. 마치 나의 어린 시절도 사라지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는 옛 동네에 찾아가 봤어.


그렇게 신나 했던 청룡열차 언덕.

그땐 숨이 차도록 길고 가파르다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걸어보니 가파르지도, 길지도 않은 열몇 걸음이면 끝나는 작은 경사가 있을 뿐이었어. 그리고 그렇게 무서워했던 언덕 꼭대기의 집주인 할아버지네 집. 그곳엔 깔끔하고 예쁜 신축 빌라가 멋진 차들을 언덕을 주차장 삼아 꼭 품고 있었어. 대문 열리는 소리만 들려도 도망가기 바빴던, 그 집에서 아무 할아버지라도 나오면 반가웠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옛 동네에서 이젠 아무것도 아닌 언덕을 따라 걸었지. 혹시나 조용히 귀를 기울여봤지만 어린 나의 시끌시끌한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조용한, 그저 조용한 동네의 분위기가 모든 것이 추억일 뿐이라는 선고인 것만 같아 씁쓸했어.

차라리 여길 찾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여기에선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언덕을 내달리고 눈이 오면 눈썰매장이 되는 그런 곳일 텐데




그래, 그건 이제 추억이구나.



잃어버리고 남은 기억,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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