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해
내가 맨 처음 무엇을 잃었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에 늘 잃어버리던 지우개야. 워낙 주위가 산만하니까 잃어버리는 것도 많았어. 하도 잃어버려서 엄마한테 많이 혼났지. 나는 특히, 지우개는 사면 일주일을 안 가더라고. 누구나 비슷한 기억이 있을 거야. 나만 그런 건 아닐 거야. 어릴 땐 뭔가 잃어버리고 다니는 일이 흔하니까, 다들 잃어버리고 혼나고 하는 거지. 뭐. 누구나 그때는 그랬어.
초등학교 1학년일까? 나는 그때, 다른 친구들처럼 수업 중에 지우개를 뜯어서 다른 친구들의 뒤통수를 맞추는 ‘총알 놀이’를 즐겼어. 지금 생각하면 매우 귀엽고 재밌는 장난이지. 생각해봐. 어린 꼬맹이가 말야. 그 오물조물, 조그만 손으로, 조그만 지우개에서 더 더 쪼그만 조각을 뜯어. 그리고 선생님 눈치를 살살 봐. 그런 다음엔 요 조그만 악동은 누구 뒤통수를 맞출까 하면서 교실 곳곳을 살피는 거야. 선생님 말씀을 듣느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착한 애들의 뒤통수는 매우 훌륭한 표적이지. 표적에 정확히 맞으면 이런 녀석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콧구멍은 벌렁벌렁, 입은 들썩들썩.
뭐, 어쩌다 한 번쯤은 선생님한테 걸려서 혼나기도 했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굉장한 스릴이었어.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또 지우개를 잃어버렸어. 아직 한참을 더 뜯을 수 있는 ‘총알 덩어리’였는데 말야.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집에 가면 엄마한테 혼날 일이 무서웠어. 그땐 이미 지우개를 여러 번 잃어버려서 엄마가 단단히 벼르고 있던 때였거든.
나는 그게 무서워서 한참을 고민을 했어.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새 지우개를 사서 필통에 채워 놓을 수도 없었어. 용돈이 없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과연 나한테 화를 낼까? 아니겠지? 누구나 기분이 좋으면 착해지잖아. 그래서 나는 엄마가 기분이 좋을 때 이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어. 엄마가 기분이 좋다면 내가 지우개를 잃어버린 일 정도는 가볍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지. (아,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엄마가 뭘 좋아할지를 생각해 봤던 것 같아.)
우리 엄마는 예뻤어. 친구네 엄마들처럼 뚱뚱하지도 않았고 뽀글이 파마를 하지도 않았어. 고급스러운 옷이나 신발, 구두 같은 건 없었지만 우리 엄마는 날씬하고 예뻤어. 미인은 꽃을 좋아한다던가? 그래서 그 날, 나는 엄마가 꽃을 받으면 정말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TV 같은 데를 보면 종종 남자가 예쁜 여자에게 꽃을 선물하면 정말 좋아하는 걸 봤거든. 그래서 나는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어. 예쁜 꽃을 꺾어야지. 마침 봄이라 산에는 꽃이 지천에 널렸어. 그중에서 나는 개나리를 꺾기로 했지. 온통 초록인 산 중에서 저 혼자 샛노란 빛을 자랑하듯 뿜어내는 개나리, 개나리는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우리 엄마같이 참 예쁘게 피었어.
개나리는 생각보다 꺾기 힘들었어.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나? 어른이 된 지금, 아직 한 번도 개나리를 다시 꺾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개나리는 잘 부러지지 않고 정말 질겼어. 흐물거리긴 했지만 잘리진 않았지. 그래서 나는 뾰족한 돌로 줄기를 썰기 시작했어. ‘쓱싹쓱싹’ 한참을 썰어도 개나리는 잘 잘리지 않더라.
개나리가 너무 질겼던가? 반쯤 썰린 개나리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다가 나는 갑자기 뒤로 넘어졌어. 손에는 볼품없이 끊어진 개나리가 들린 채로 말야. 엉덩이는 아프지. 옷은 온통 흙 투성이지. 손은 여기저기 까졌지. 나는 그만 아무도 없는 산에서 엉엉 서럽게 울고 말았어.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시련이었나? 그런데도 나는 울면서도 끝까지 개나리 두 줄기를 더 잘라냈어. 이미 지우개를 잃어버린 것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은 잊어버렸고 그냥 이 꽃을 가져가서 엄마를 기쁘게 해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거든.
그렇게 나는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한 채 개나리 세 줄기를 달랑달랑 들고 집으로 들어갔어.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어이구 우리 아들 무슨 일 있었어? 하시면서 나를 안아줬지. 엄마 품은 언제나 그랬듯 포근하고 좋았어. 그런 엄마 품에 안기고 나니까 나는 또 눈물이 핑 돌았어. 품에 안긴 채 엉엉 울면서 나는 산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했지. 엄마는 내가 말 한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랬어?’, ‘어이구’ 하면서 맞장구를 쳐줬어. 나는 또 거기에 신이 나서 우는 것도 잊고 쉼 없이 재잘거렸어. 이야기는 금세 절정에 이르렀지. 개나리를 꺾어 온, 나의 투쟁의 역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자랑스럽게 엄마한테 개나리를 보여줬어. 지금도 엄마의 환한 미소가 기억난다. 엄마는 꽃이 예뻐서였을까 아니면 나의 마음이 가상 해서였을까? 엄마는 입이 쩍 벌어지게 놀라워했고 고마워했고 또 꽃을 마음에 들어했어. 내가 덜렁거리면서 가져오느라 꽃잎이 죄다 뭉개진, 볼품없게 줄기가 썰려 나간 개나리를, 코 가까이 대면서 향이 참 좋다. 색이 참 예쁘다. 하시면서 좋아했어.
엄마의 기분이 좋아진 이 순간,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어. 다시 나의 목적으로 돌아왔지. 후후후. 이런 요망한 꼬맹이. 나는 엄마한테 별거 아닌 일이라는 투로 이렇게 말했지.
“엄마, 그런데 어, 나, 지우개 또, 어, 잃어버렸어요.”
‘괜찮아. 괜찮아. 우리 아들’할 줄 알았던 엄마는 나한테 이랬지.
품에 안겨있는 나를 홱 밀치면서
“네 이노옴! 또!”
그리고 개나리는 회초리가 됐지.
고생만 실컷 하고 혼나기까지 하고,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어. 그런데 지우개는 말이야. 나중에 청소시간에 교실 뒤에서 찾았어. 내 조그만 지우개가 검정 때를 실컷 입고 내 이름의 마지막 한 글자까지만 남겨진 만큼 더 쥐어뜯어져서 더 조그매져 있었어. 그걸 주워서 바지에 슥슥 문질러보기도 하고 누가 그랬지 하고 잠깐 여기저기 둘러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냥 휴지통에 던져버렸지. 나는 새 지우개를 샀으니깐.
시간이 좀 흘러서 머리가 좀 굵어지고 생각도 좀 많아지고, 내가 어른스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이 좀 있어서 그랬을까? 뭔가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해 슬슬 생각해 볼 즈음 이런 기억이 떠오른 거야.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참 많아. 잃어버리는 중인 것도 있고, 앞으로 잃어버릴 것도 있어.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 기록해 보려고 해. 내가 잃어버린 지우개처럼 남이 잃어버리지 말라고 한 것들은 나한테 중요하지 않으니까 쉽게 잃어버리고 쉽게 잊는 것 같아. 내가 정말 지우개를 소중하게 여겼다면 엄마한테 꽃을 꺾어다 주는 대신 내 지우개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첫 번째 마무리,
잃어버린 건 소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