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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송 박현우 May 01. 2020

김집 고문님을 추모(追慕)하며....

황학정 30대 사두를 하셨던 김집 고문님이 28일 향년 93세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1996년 황학정(黃鶴亭)에서 집궁(執弓) 하였기 때문에 고인(故人)과 오랫동안 인연이 있었습니다. 김집 고문님은 황학정 30대 사두(1999-2000)를 역임하셨고, 「국궁(國弓) 1번지」를 발간하셨고, 「우리활 교본」과 「국궁교본」을 저술하셨고, 황학정 백년사(百年史)를 편찬하셨고, 장안편사 복원에 기여 하시는 등 국궁계에 아주 큰 업적을 남기신 분입니다.




김집 고문님의 별세와 우리 안양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우리가 활을 쏠 수 있게 된 것은 1899년에 황학정이 개정(開亭)되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내용이 고인이 편찬하신「 황학정 백년사」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황학정의 개정과 근대 활쏘기의 관계를 궁도인들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해서 황학정 백년사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고, 황학정이 국궁 1번지라고 불리는 이유도 살펴보겠습니다.


1. 황학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 활쏘기도 없다.


일제의 식민지 시절인 1894년 갑오경장으로 활과 노(弩)는 우리나라 군대의 무기체계에서 해제됨으로써 무과를 지망하여 활쏘기를 하던 젊은이들은 민간사정(民間射亭)에서 대거 이탈하고, 활쏘기는 개화(開化)를 위해 배척당하는 구습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각지방의 관에서 운영하는 사정들은 모두 폐쇄되고 도시의 민간사정들은 지탱해 나갈 수가 없어서 차례로 문을 닫아 폐허화 되었습니다. 서울 장안에 48개나 되던 민간사정도 갑오경장 이후 모두 폐허화 되고 몇몇 노인 궁사들이 백호정(白虎亭)의 후신인 풍소정(風嘯亭)에 모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인 1899년에 고종황제의 지시로 황학정(黃鶴亭)이 건립 되었습니다. 갑오개혁 이전에 서울에 활터가 48개나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선조대왕은 국민들에게 상무삼(尙武心)을 키우기 위해 경복궁 안에 오운정(五雲亭)을 세우고 남녀노소 모든 국민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하였는데 300년이 지나 고종황제는 갑오개혁으로 우리 활이 쓸모가 없게 된 상황에서 황학정을 건립하여 우리의 전통무예인 활쏘기 문화를 소생시켰습니다.  

    

1899년 황학정이 건립될 당시 한반도에는 세계열강이 모여들어 각축전을 벌이고 있을 때라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황제가 자신이 시행한 근대화 개혁인 갑오경장으로 말미암아 몰락하게 된 활쏘기 문화를 소생시키는 계기가 된 황학정 건립 지시를 내린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활이 비록 조선군대의 무기에서 해제되었어도 국민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궁술은 장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윤음(綸音)을 내려 황학정을 개정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1899년 6월 9일 ~ 6월 20일에 독일의 하인리히 친왕(親王)이 방문하여 덕수궁에서 고종황제를 배알(拜謁)했을 때 「조선에 고유한 무술이 있으면 구경을 시켜달라」고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종황제는 무감(武監)에게 갑오경장 이전에 활 잘 쏘던 명궁들을 불러들이도록 했습니다.     


급히 소집된 6명의 명궁들이 경복궁에서 하인리히 친왕에게 활쏘기 시범을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친왕은 경희궁에서 있은 조선군대의 집총훈련은 단 10분간도 보지 않았는데 경복궁의 활쏘기는 반나절이나 더 보내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하인리히 친왕은 한순에 4중 5중하는 우리 활쏘기에 경탄하면서 과녁에 박힌 화살을 뽑아 보기도 하고 몸소 활을 쏘기도 했는데 활 시위에 빰을 맞으면서도 50대 만에 기어이 한 대를 관중시켰다고 합니다.      


하인리히 친왕이 돌아간 뒤 고종황제는 「활이 비록 조선군대의 무기에서 해제되었어도 국민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궁술은 장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윤음(綸音)을 내려 황학정을 개정하게 하셨습니다.    

  

활쏘기를 장려하는 칙령을 받은 초기에는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던 내시와 조관(朝官)들이 덕수궁 모서리에 터를 잡고 활을 쏘다가 경희궁 북쪽 기슭에 황학정이라는 사정을 지어 민간에 개방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일본사람들이 경희궁을 헐고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황학정도 헐리게 될 처지였는데 박영효 등의 노력으로 지금의 황학정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황학정이 옮겨간 곳은 과거시험을 보던 등과정(登科亭)이라는 활터가 있던 자리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황학정에 가보면 정자 앞쪽에 登科亭이라는 글자가 바위에 새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0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는 긴 역사를 가진 활쏘기도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사라질뻔하다가 1899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하인리히 친왕이 국궁에 관심을 보이는 바람에 고종황제가 백성들이 심신단련을 위해 활을 쏠 수 있게 황학정을 개정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활쏘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조선(朝鮮)의 궁술(弓術)」이 발간하게 된 곳이기도 하고, 대한궁도협회가 탄생된 곳이기도 합니다.



하인리히 친왕이 국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고종황제가 황학정 개정에 관한 칙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조선의 궁술」이 어떻게 출판되었을 것이며, 우리들이 지금처럼 안양정에서 활을 쏘는 현실이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김집 고문님이 일제 강점기의 신문기록을 찾아가며 황학정 100년사를 집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이런 사실도 모르고 활만 쏘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가정할 수는 없겠지만 생각할수록 아찔합니다.


2. 황학정이 國弓 1번지로 불리는 이유   


고인은 황학정의 총무를 하시면서 「國弓 1번지」를 발간하시고 전국 사정에 보급하셨습니다. 그 뒤 황학정은 국궁 1번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적으로 근거를 따져 보면 황학정이 국궁 1번지로 불릴만한 충분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째, 고종황제가 머무시던 경희궁 안에서 왕이 직접 활을 쏘며 궁예(弓藝)를 장려하던 왕궁 안의 활터라는 역사적 맥을 계승한 사정은 우리나라에 오직 황학정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갑오경장으로 구습이라고 철폐되었던 활터들이 하인리히 친왕의 국궁에 대한 관심으로 1899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황학정이 건립되는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전국에 활터들이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황학정은 「대한궁도협회」, 「대한양궁협회」의 발상지이며 본거지라는 사실입니다. 1922년 7월 1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 1번지의 황학정에서 발기인 35인으로 「조선궁술 연구회」가 창립되었으며, 1926년 5월 20일에는 「조선궁술연구회」를 「조선궁도회」로 개칭하였고, 1946년 2월 10일에는 「조선궁도회」를 「조선궁도협회」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궁도협회는」 1966년 6월 22일 협회 사무국을 서울특별시 무교동 19번지 대학체육회관으로 이전했습니다. 이것은 1922년 조선궁술연구회가 발족해서 1966년 대한궁도협회가 체육회관으로 이전할 때까지 무련 44년 동안 황학정은 우리나라의 궁도를 지도해 온 총본산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한궁도협회가 황학정에 자리 잡고 궁도협회 간부들이 모두 황학정에서 활을 쏘던 황학정 사원들이었습니다.       


넷째, 황학정이 종로구 사직동 산 1번지라는 사실입니다.   국궁 1번지인 황학정은 사직단과 함께 사직동 1번지로 돼 있으니 황학정을 국궁 1번지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거나 지동상으로 보거나 황학정은 국궁 1번지라고 불릴만한 충분하고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3. 국궁교본(國弓敎本)


고인은 황학정 궁도교실을 만들고 궁도교실에 사용할 목적으로 「우리활 교본」이라는 소책자도 발간하시고 2005년에는 388쪽의 「국궁교본(國弓敎本)」도 출간하셨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 나온 국궁 관련 책 중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이 국궁교본인데 츨판된 지 15년이 지나 지금은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원 여러분들의 활 공부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국궁교본(國弓敎本)」 161쪽에 나오는 「궁도 격언(格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활쏘기는 그 어떠한 작은 동작도 온몸이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한 부위만의 동작이  아니다.

 반성을 모르는 자기만족의 활쏘기는 향상될 길이 없다. 언젠가는 활병이 생기고 약회되어  마침내는 폐궁(廢弓)에 이른다.

▣ 일사(一射) 일시(一矢)마다 반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 사법의 모든 동작은 인과관계(因果關係)로 맺어져 있다. 어느 한 곳이 잘못되면 활쏘기는 망가진다.

▣ 국궁의 특징은 자기통제와 정서의 안정을 가장 엄격하게 요구한다는 데 있다.

▣ 활쏘기에는 지름길이 없다. 쉽고 편하게 쏘려고 하는 간사한 마음은 꾀활을 낳고 꾀활은 마침내 페궁에 이른다.

▣ 활쏘기의 재주는 두 손끝에서 나온다. 그러나 두 손끝에서 나오는 그 재주의 뿌리는 온몸이다. 온몸이 두 손끝의 재주를 위해서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 활쏘기의 연습은 혼자서 하면 나쁜 버릇에 빠진다. 사법(司法)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세 친구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서로 거울이 되면서 깨우쳐 주어야 한다.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바를 말해주면 곧 탈을 없애고 바른 사법을지킬 수 있다.   

  

황학정 30대 사두를 역임하셨던 김집 고문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고인을 추모하며 고인이 우리 국궁계에 남기신 여러 업적을 되돌아보면서 안양정 사원 여러분들의 활 공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긴 글을 올려 봅니다.          

                         

                                2020. 4. 30.     

안양정(安養亭) 사원(射員) 호아루 박현우(朴賢優)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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