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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Apr 02. 2019

좋아보여 잘지내나봐

헤어스타일도 바꿨네 역시 술은 중국술

[좋아보여 잘지내나봐 헤어스타일도 바꿨네 역시 술은 중국술]


그건 사실 그닥 가고 싶은 전시는 아니었다. 자고로 전시회라 함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얻고 경험을 쌓았다는 지적 허영심을 충족해줘야 하는 곳이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올리기 좋게 예쁜 사진이 찍힐 만한 포토존도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게 메인이 돼선 안 된다는 의미다. 페인트 쏟아놓고 깡통 엎어놓고 카세트테이프 필름을 이리저리 늘어놓은 현대미술 전시라면 세상 그 어디보다도 예쁘고 힙한 사진 찍기엔 적합하겠으나, 무형적인 어떤 가치를 얻기엔 턱없이 모자랄 게 분명했다. 그런 건 전시회라기보단 포토존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우리의 평소 소신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전시회인지 포토존인지를 보러 왔다. 공짜로 얻긴 했지만 표 값이 2만원에 상당했으며, 그날은 단 한 달도 안 한다는 그 희소한 전시회의 마지막 날이었고, 영화관에는 ‘어벤저스’ 씨리즈 따위만 걸려 있어 딱히 데이트할 거리도 없었기에 그랬다. 전날 맥주와 연태를 섞은 '대륙횡단주'를 어마어마하게 마시며 사랑을 속삭인 탓에 둘 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입에서는 씁쓸한 연태 특유의 사과향이 났지만 우리는 꾸역꾸역 전시가 열린다는 인사동으로 향했다.


오후의 햇살은 한여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조계사 앞에 내리자마자 정수리가 타는 것 같았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맨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제 마신 대륙술의 기운이 얼굴에 다 몰린 것 같았다. 석이 내 손을 잡았지만 나는 석의 손을 뿌리쳤다.


“더워!”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했더니 석은 그래?, 하고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악! 더워!”


장난스럽게 발버둥을 치자 석이 나를 놨다. 나는 석을 노려보다가 석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석의 손엔 땀이 흥건했다. 그 손을 잡고 전시회장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내 손도 마찬가지로 젖어 버렸다.


전시회장은 인사동에 이런 데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사람은 제법 많았다. 이리저리 페인트칠을 한 벽 아래 눈에 X표시가 된 곰인형이 쓰러져 있고, 거기가 메인 포토존인지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러 줄을 서서 기다렸다. 화장 안 한 건 물론 어제 마신 대륙의 술 때문에 얼굴이 딥따리 부어 있는 상태라 사진은 고사하고 그냥 천천히 구경을 했다. 석이 간간히 “사진 찍어 줄까?” 라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과연 우리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해줄 만한 콘텐츠는 거의 없었다. 다만 1층에서 지하로 점점 내려간다는 전시회장의 구조 자체는 상당히 참신했고, 중간중간 신기한 그림이 몇 점 있어 그런 것들에 대해 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아쉬운 대로 지적 허영심을 채웠다.


그 밖에는 예상대로, 페인트 쏟아놓고 깡통 엎어놓고 카세트테이프 필름을 이리저리 늘어놓은 게 다였다. 작가가 왜 페인트를 쏟아놓고 깡통을 엎어놓고 카세트테이프 필름을 이리저리 늘어놓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따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러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어제 마신 대륙 술의 잔해가 관자놀이를 쿡쿡 쑤셨다. 아, 진짜 내가 다시는 술 안 먹는다. 중얼거렸더니 석이 동의의 표시인지 공감의 표시인지 내 손을 꾹꾹 눌렀다.


가장 마지막 층에 도착했을 땐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마지막층에는 딱히 작품이랄 것도 없었고 벽에 그림이 몇 점 걸려있는 가운데 카페처럼 꾸며진 테이블과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서서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팠다. 혹시 앉을 자리가 없을까 싶어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가 익숙한 모습을 봤다. 얼굴보단 낯익은 옷차림이었다. 불과 며칠 전 본 것 같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그런 옷. 티셔츠와 확연히 대비되는 시꺼먼 팔이 눈에 들어왔다. 팔만큼 새까만 얼굴은 분명, 7년 전 매일같이 보던 그 옷과 그 옷의 주인이었다.


그 남자 역시 앉을 자리를 찾는 듯했다. 나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척을 했다. 자리는 없었다.


“앉을 데가 없네.”


석은 그러게, 하고 여기 그림만 보고 나가서 커피한잔 할까? 했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벽에 걸린 그림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내 온 신경은 그림이 아니라 베이지색 티셔츠의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남자의 옆에는 누가 봐도 어려 보이는 여자애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거리로 미뤄보아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썸 타는 사이일까.


멀리서 봐도 남자의 눈썹은 가지런해 보였고 머리도 단정했다. 연인이 없다면, 저런 관리는 누가 해준 게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자기가 한 것이리라. 스스로 눈썹을 다듬고 머리를 정리할 수 있는 남자답게 그의 표정은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계속 그림을 보는 척 하며 그 남자를 곁눈질했다. 남자도 계속 주변을 둘러봤지만 나와 결코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아마 저 남자도 계속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눈맞춤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아마 생각마저 똑같이 하고 있었을 터였다.


아, 쟤가 이런 데를 오다니.


내 옆에 석이 아니라 저 남자가 있었던 시절, 나는 대륙술은 커녕 천이백원짜리 소주도 취할 때까지 마시지 못했고 전시회라는 데에 가 본 적도 없었다. 포토존이든 지적 허영심이든 그런 거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렸고, 가난했고,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문득 그나마 할 수 있던 문화생활이 떠올랐다. 할인쿠폰을 써서 cgv에서 영화를 보는 거였는데, 남자는 매번 어벤저스 같은 거나 보면서 되게 좋아했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어벤저스 같은 거'라고 표현할 만큼 나는 그런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극장에 갈 때마다 그와 아껴둔 포인트로 어벤저스 씨리즈를 봤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석과는 단 한 번도 어벤저스 시리즈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영화에서도 지적 허영심을 추구하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2018년의 저 남자는 이 전시에 포토존을 위해 왔을까 지적 허영심을 위해 왔을까? 하지만 그때 어벤저스를 좋아했다고 해서, 포토존이라고 단언해 버릴 순 없었다. 7년이라는 깊은 세월이 파이는 동안 달라진 외모만큼 우리의 많은 것들도 달라졌을 게 분명하니까.


늘 지저분하던 눈썹과 덥수룩한 머리를 스스로 정리할 수 있고, 썸타는 여자를 이런 전시회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데려올 정도라면 지금의 그는 내 기억보다는 훨씬 괜찮은 남자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마 그 역시 이제는 안주도 없이 동네 편의점 평상에 앉아 나눠먹던 천이백원짜리 소주가 아니라, 외국 술이 불러온 숙취에 찌든 채 하루를 시작하는 날도 있을 것이었다. 잠시 후 남자는 그 여자와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전시장을 나섰다.


고개를 돌려 석을 바라봤다. “이제 갈까?” 나는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림을 한바퀴 다 둘러본 모양이었다. 나는 석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당신 되게 멋있네. 생각할수록 지적이고. 성숙한 것 같아.”


석은 미심쩍다는 듯 “갑자기 왜?”하고 물었다. 웃음이 터졌다. 아냐, 그리고 우리는 진짜 잘 맞는 환상의 커플 같아. 어벤저스도 안 좋아하잖아. 석은 갑자기 뭔 어벤저스래, 하면서 또 내 손을 꾹꾹 눌렀다.


밖으로 나섰는데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다. 9월 말의 날씨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더위였다. 햐, 한숨을 쉬는데 입에서 대륙술의 맛이 난다. 얼마나 폭음을 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뭐 극장에서 어벤저스 씨리즈나 보는 것보단 낫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석의 손을 꽉 잡았다.


* 몇년 전 타지에 결혼식 가다가 기차 안에서 할 게 없어서 써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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