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한 사건들도 매일 진짜로 일어나
나는 원래 보아언니의 팬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노래들이 몇 개 있다. 댄스곡 중에는 ‘copy and paste’가 최애곡인데, 그 노래는 가사가 너무 하나하나 명언처럼 가슴에 와닿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닿는 가사는 이것.
“영화보다 더한 사건들도 매일 진짜로 일어나”
그건 진짜다.
나는 운명론자다. 운명이니 인연이니, 모두 존재한다고 믿는다. 상당히 로맨틱한 생각인데, 실제로 내 운명과 인연들은 여태까지 꽤 낭만적이었다. 흔한 영화보다도 더.
30년 가까운 인생에 낭만이라곤 씨가 마른 이 반도의 거주자치고는 제법 로맨틱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신랑과의 첫만남은 -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6년 전, 2014년 초여름이다. 이 글을 처음 쓴 건 2016년이었고, 지금 여기 올리는 것은 당시 쓴 글을 꽤 다듬은 것이다.
당시 나는 3년 간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던 나의 첫사랑과 완전히 헤어졌다. 이유는? 파병 떠나기 하루 전날, 집근처에서 기다리겠다던 그가 우리집 우편함에 엄청나게 말도 안되는 통보를 두고 가서. ‘난 니가 바람 피운거 다 알아. 마침 파병 가니까 헤어져. 넌 남자 꼬실 생각뿐이고 진짜 나쁜년이야!’
작은 오해들이 떨어져 있는 사이 겹치고 덮친 것뿐이었지만, 해명할 여지도 없이 그는 저멀리로 이미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억울하다. 아닌데. 아니라고!! 바람 타령은 군대에 갇혀 있던 그가 혼자 착각한 것이었고, 사이가 멀어지게 된 원인인 각종 잘못들은 둘 다 똑같이 잘못했다. 근데 왜 나만 잘못이라는 식으로 뒤집어 씌워?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가스라이팅 오졌따리.
하지만 그당시, 즉 스물세살 그때는 억울하지 않고 슬펐다. 다 내가 오해할만하게 굴어서 그런거지… 정말 그런 게 아니었고 난 어딜 가도 네 생각뿐이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이해못했구나... 더 잘해주지 못한 내가 나빠… 라고 자괴감에 빠져벌였다.
그 직후 2주 간 나 자신을 학대했다. 과일소주도 없던 시절에 깡소주를 매일 하루 두 병씩 들이켰고 평소 하루 두세개비 피우던 담배를 한 갑씩 피워댔다. 그리고 질질 눈물콧물을 다 짜며 침대 위로 쓰러져 잠들었다. 으헝… 넌 지금 어디에 있을까. 선물로 준비했지만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마스크팩과 알로에젤 그리고 전자시계와 운동화를 바라보고 눈물을 질질 짜며 잠들던 나날이었다.
결국 2주가 지나자 내 온 몸이 고장이 났다. 냉철한 악인, 즉 마치 배우 곽도원과 비슷하게 생긴 의사선생님은 "아가씨 또 술 마시면 죽을 수도 있어요”라며 “사실은 그정도는 아니지만 진짜로 좀 그만 마셔요“라고 걱정해주셨고, 나는 실연당한 사실은 슬펐지만 아프기는 싫어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 시기에 술을 먹을 수 없던 친구와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쌩얼에 추리닝 바지, 바람막이에 감지 않은 머리를 한 채로 만난 우리는 자전거를 잠깐 타다가 춤을 추고 싶어졌다(?).
그래서 춤을 추러 갔다. 그 차림으로 클럽은 무리라서 우선 홍대 모 바에서 무알콜 칵테일을 시켜놓고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놀다가, 나와서 신촌 마익스캐빈으로 갔다.
마익스캐빈은 신촌지역 외국인 학생들이 주 고객인 펍으로, 이름 그대로 오두막처럼 생겼다. 춤도 출 수 있고 게임도 할 수 있다. 클럽처럼 끈적한 분위기는 전혀 없기에 복장도 상관 없었다. 물론 추리닝에 쌩얼, 안 감은 머리를 한 채 방문하는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겠지. 그 상태로 우리는 춤을 엄청 신명나게 췄다.
웬 아저씨가 자꾸 와서 말을 걸었다. 술 한 잔 사 주고 싶다고, 너무 멋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술을 못 먹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뭘 마실 수 있냐고 해서 물을 사 달라고 했더니 또 신기해하며 맨정신으로 지금 이 모습으로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고맙다고 하고 계속 춤을 추다가, 조금 힘들어져서 밖으로 나왔다. 둘이 그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까 그 아저씨의 일행 중 한 명이 대뜸 우리한테 다가왔다. 눈이 크고 싸납게 생긴 남자였다.
"누나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몇 살인데 누나래? 보다 앞서, 나는 전에도 얘기했듯 길에서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에게 굉장히 경계심을 가진다. 하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누나라니. 몇 살이세요?"
그러나 그 싸나운 인상의 남자는 친구의 말을 묵살했다.
"내가 여기 거의 10년째 오는데 이런 모습으로 오는 여자는 처음 봤어. 누나들 우리랑 술 먹어요. 우리가 살게요. 누나들 엄청 웃길 거 같어."
그 쪽은 네 명이었다. 우리는 술을 못 먹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 싸나운 남자가 말했다.
"그래? 그럼 술은 우리가 마실테니 앉아 있어!"
새벽이었다. 때마침 나랑 친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설렁한 바람이 불었다. 따끈한 오뎅탕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남자 대 여자로 놀자는 것도 아니고, 우리 술도 못 먹는데 그냥 오뎅탕이나 먹고 첫차 뜨면 집에 가자! 우리는 그 남자들을 따라 새벽에도 여는 신촌주막으로 갔다. 지금은 XX비어라는 신식 술집으로 바뀌어버렸지만 그곳은 원래 허름한 주막이었다.
얘기를 듣자하니 그들은 서른 살로, 의외로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우리가 X대생이라고 하니까 놀랐다. 나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유럽의 어느 나라로 함께 교환학생을 다녀왔던 사이라고 했다. 싸나운 남자는 매우 보수적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나와 정치 성향이 잘 맞았다.
그냥 그랬다. 그 때는.
투 비 컨티뉴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