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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Jul 22. 2020

생리의 추억

벌써 생리 16년차.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경력이다.

초경은 16 ,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  갑자기 찾아왔다. 아침에 화장실에 갔는데 갈색의 무언가가 속옷에 조금 묻어 있었던 거다.


생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가끔 구성애 선생님의 ‘아우성' 비디오 같은 것을 보여주곤 하셨으니까. 그 시간에 교실엔 여자애들만 있었다. 남자애들은 그 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던 것 같다.


구성애 선생님의 열혈 강의를 들었음에도 이 초콜릿색의 무언가와 생리가 곧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한참 그걸 멍하게 본 거 같다. 그날 오후 나는 엄마한테 조용조용 소근소근, 자고 일어났더니 갈색이 묻어 있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축하한다며 생리대 사용법 같은 걸 알려줬다.


그렇게 생리를 시작했는데, 학교에서는 그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반에는 그걸 시작한 여자애들이 반 정도 됐고, 우리는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그거를 꽁꽁 숨겨서 다녔다. '아우성' 비디오를 여자애들만 모아놓고 보여준 것 자체가 그런 암묵적 규정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이듬해 나는 중학생이 됐고, 집에서 가까운 여중에 진학했다. 혈기왕성한 10대 중반의 여자애들을 몰아놓은 그 곳은 정글이었다. 사회에서 터부가 되는 것들은 우리에게 놀이였다. 우리끼리 있을 땐 -선생님이 앞에 계시더라도- 생리대를 숨기지 않고 거리낌 없이 큰 소리로 "생리대 있는 사라아아암?!"하고 외치고 다녔다. 여중에 첫 부임한 남자 선생님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더 그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학원에서 남자애들과 있게 되면 생리대를 숨겼다. 핑크 교복 파랑 교복 입고 학원 앞 패밀리마트에서 함께 케로로 빵 사먹었던 썸남(혼다 닮음) 앞에서 생리 같은 말을 하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학원에서 갑자기 생리가 터지면 여자애들은 소곤소곤, “야 너 ‘그거’있어?”라고 물었고 남자애들은 못 들은 척 자리를 피했다.


그냥, 다들 그랬다. 자연스러웠다. 왜였을까?


중학교 시절 어느 여름 날엔 이런 기억도 있다. 엄마와 동생들이 바닷가에 놀러 갔지만 나는 생리 중이라 집에 남아 있었는데, 회사에 있던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랑 애들 바다 갔어요."


"너는 왜 안 갔어?"

"어. 음. 그러니까. 저 그날이라."


잠시 아빠는 침묵했다가. "부끄러운 아이네."라고 말했다.


여자애들만 모아놓고 보여준 아우성 비디오, 짓궂게 생리 얘기를 하는 애들 앞에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남자 선생님들, 속닥대는 여자애들을 못본 척 자리를 피한 남자애들, 그리고 ‘부끄러운 아이'라는 아빠. 아마 그런 기억들 때문에 남자 앞에서는 생리대를 나도 모르게 숨기게 됐을 것이다. ‘그거’는 이름조차 불러선 안 될 정도로 부끄럽고 숨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이후 나의 인생은, 생리 외에도 여러가지 면에서 비교적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흘러갔다. 여고와 여대에 진학한 것이다.


생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에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생리대나 탐폰을 양손에 들고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에 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생리용품을 숨기는 게 더 웃기게 여겨지고, 탐폰을 끼면 처녀가 아니라느니 하는 헛소리들이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런 자유와 함께 '생리는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도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딸에게 처음으로 생리 이야기를 들어 당황했던 아빠에게도, 어느 순가부터 자연스럽게 "아이고 생리통 때문에 아빠딸 숨지겠다"라거나, "깁미머니~~(왜) 탐폰이 너무비싸서용~~~" 같은 말들을 할 수 있게 됐고, 아빠도 그런 말들을 받아칠 만큼 '딸을 둔 아버지'로서 성장(!!)했다. 그렇게 나의 세계에서 생리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첫 사회생활 전까지.


대학교를 휴학하고 첫 인턴을 했던 회사의 구성원은 나를 빼고 전부 남성 그리고 35세 이상의 아저씨들이었다. 업무도 업무였지만, 당시에는 카페에서 남자 알바랑 눈만 마주쳐도 휙휙 눈동자를 돌려버렸던 여중여고여대병 환자로서 남초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너가 예쁘게 하고 와야 우리도 회사 올 맛 나지”라며 대놓고 외모평가를 해 오는 배나온 아재들을 위해 23세의 초특급 미녀 사회초년병은 예쁘고 불편한 옷을 입고 얼굴에 화장을 덮었다.


그래, 그런 건 뭐, 조금 부지런해지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치고.


이미 몸에 한 번 든 습관은 바뀌기 어려웠다. 생리를 하던 어느 여름날, 업무 중이던 나는 별 생각 없이 탐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생리를 하는 중이니까 화장실에 갈 때 탐폰을 바꿔 끼워야 한다<< 이건 굳이 생각을 하고 단행할 행동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얼마 후 회식자리에서 아저씨들은 나에게 괜한 헛기침을 하며


"아니~ 다 좋은데. 소지품은 좀 조심해서 들고 다니자구."


"그러니까. 나도 너무 민망했다고."


이런 얘기를 했다.


변기 위해서 초경을 마주했던 그 날처럼, 처음에는 저 말들과 생리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자 아저씨들은 짐짓 놀란 척하며 "아니, 그러니까, 그거 말이야. 그거. 여자들."이렇게 말하고 자기네들끼리 역겹게 괜히 민망하고 쑥시러운 척하며 "마셔! 마셔!" 해댔다.


그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밀려왔다. 생리대를 옷소매에 숨기고 화장실에 갔던 초등학생들, "부끄러운 아이네." 아빠의 말, 눈살을 찌푸리던 남자 선생님들, 학원 남자애들 몰래 생리대를 가방에서 꺼냈던 중학생들... 아, 나는 너무 여자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 남자들 앞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잊었던 것이었다...


는 개뿔.


내가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 묻힌 탐폰을 선물한 것도 아니고, 탐폰 끝가닥 실로 머리를 묶고 다닌 것도 아니고, 탐폰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책상에 올려둔 것도 아니고, 탐폰을 가방 가득 담아왔다가 바닥에 쏟은 것도 아닌데 뭔 탐폰을 어떻게 하면 '조심히' 들고 다니라는 말이냐. 탐폰에 세니타이저라도 발라야 하냐? 탐폰을 확 콧구녕에 꼽아버릴라ㅡㅡ


게다가 당시는 여름이었다. '너가 예뻐야 우리가 능률이 난다'고 주장하던 아재들이 원하는 대로 짧은 팔 블라우스에 주머니 없는 짧은 치마를 입었는데 대체 어디에 어떻게 생리대랑 탐폰을 숨긴단 말인가? 뭐 초딩 때처럼 소매에 숨기거나, 중딩 때처럼 후드 주머니 안에 숨기거나 할 수 있던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냥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나에게 한 것이다. 짧은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다니되 생리용품은 눈에 띄지 않게 해라! 말이 되냐고요?


그 날 이후 kibun이 졸라 상한 나는 굳이 생리용품을 숨겨서 다니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다. 뭔가 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 생리에 아재들이 보태준 게 있나요?


아저씨들의 헛기침은 커져만 갔지만, 그 때마다 나는 슈퍼사이즈 탐폰을 그들의 한쪽 콧구녕에 쑤셔박아 반대쪽 콧구녕으로 숨쉴 때마다 탐폰 실이 대롱대롱 흔들리는 통쾌한 상상을 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탐폰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오늘날도 그러고 있다. 올리브영에서 탐폰을 결제하고, "안 보이는 봉투에 한 번 담아드릴까요?"라는 친절한 직원의 말에도 “괜찮아요"을 외치고 흔들흔들 한 손에 들고 가게를 나서는 자유영혼. 오랜만에 옷장에서 꺼낸 바람막이 주머니에서 탐폰이 우수수 나와도 담담하게 다시 주섬주섬 챙기는 탐폰주머니 보유자. 걸어다니는 탐폰전도사 뉴디터는 오늘도 숨기지 않긔. 나의 전투력을 키워준 그 회사 아저씨들 덕분에 오늘날의 내가 있다는 점에서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어쨌든 탐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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