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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Oct 17. 2020

착실한 인생과 노화의 쁠마 상관관계

진시황이 왜 그렇게 불로장생에 환장했는지 이해가 가는 요즘이다

페이스북에 5년 전 오늘 찍었던 사진이 떴다. 과방에서 과잠을 입고 찍은 셀카.


사진을 보면서 그 날 있었던 일도 생생히 기억났다. 하반기 취업못한다고 징징거리면서 우울하다고 어떻게 해도 토익 점수가 안오른다고 인생 망했다고 뗑깡을 쓰며 이대 앞 JJ사주에 타로를 보러 갔었다. 그 당시의 우울했던 그 마음이 고대로 떠올랐다. 그것과 별개로 어쨌든 사진 속 나는 젊고 귀여웠다. 


저 때 그래 봤자 24살이었는데 뭐 그렇게 슬픔이 많았던 걸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 꼰대처럼 "젊은 사람이 뭐가~~" 타령을 할 것도 아니었다. 젊었지만 슬플 수밖에 없던 때다. 왜냐면 돈과 안정과 사회적 지위가 없었으니까. 돈과 안정과 사회적 지위가 있는 지금에나 태연하게 "저렇게 젊고 이쁜데 왜 슬프냐"고 딴지를 걸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피부 탄력이 없고 시간이 없고 과잠을 입을 수가 없는 어르신이니까.


5년 전의 나에게 훈수를 둘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5년 후 나는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상상하거나 5년 후의 나를 만들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할 건 무엇일까? 라고 착실한 계획을 세우는건 별 의미가 없는 일 같다. 그런 상상이나 계획과는 별개로, 그 때쯤 됐을 때 내가 뭘 갖고 뭘 잃게 될 지는 그 상황이 닥쳐봐야 아는 거니까 말이다. 5년 전 나는 5년 후의 내가 피부 탄력과 시간, 과잠 착용의 자유를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앞으로 5년 후에는 또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지,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5년도 조금 더 전 여름날의 일이다. 한양대 운동장에 앉아 밤새 소주병에 빨대꽂고 마시면서 이문세의 '알수없는 인생'을 들으며 눈물짓던 스물네살의 밤.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그 때는 인생이 흐트러진 퍼즐조각 같았다. 지금 가진 건 하나도 없고, 앞으로 뭘 가질 수 있을지 뭘 갖고 싶은지조차 전혀 감이 없었던 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참 낭만적이고 그립지는 않고, 그냥 그럴 수 있던 체력이 부럽다. 아마 그런 체력은 다시는 내 인생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정작 그 때는 그 때의 체력이 영원하고, 나머지 것들은 열심히 살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은 결국 쁠마제로. 5년 전 한 줌도 쥐고 있지 못했던 돈과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양손에 쥐게 된 대신 시간과 체력과 과잠의 자유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것들이 두 손에서 빠져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었다. 이제 다시는 밤새 술을 마시고 놀 수 없다. 그럴 힘이 없어...  쌔삥 아이폰같이 배터리도 오래가고 튼튼하고 이쁜 20대를 보낸 뒤에는 3년 사용한 아이폰6S 같이 속은 곪았지만 겉면은 그럴듯해 보이는 몸을 이끌고 30대를 버티고, 6년 쓴 갤럭시S2 같이 겉도 속도 다 낡아버린 몸을 이끌며 40대를 지나다 보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게 그냥 인생의 덧없음인 것 같다. 진시황이 왜 불로장생에 그렇게 목을 맸던 건지 너무 이해가 간다. 진짜 불로장생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인생을 착실하게 살면서 손 안에 얻는 것이 많아도 노화로 인해 잃는 건 없을 텐데. 하지만 한낱 인간인 나는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노화를 받아들이는 법을 익혀야만 할 터다.


그래도 마감이 끗났다는 게 한 줄기 위안이다.

육체가 낡기 시작한 뉴디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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