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남자들이 다 똑같다면, 그들 중에서도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은 사람과 좀 더 사랑에 빠지기 쉽겠다. 단순한 열정을 읽은 남자들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서도 화자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 남자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아니 내 멱살을 내어주어서라도 결혼해버리고 말 거야…..
이미 옷으로 이름을 떨친 패션회사들도 종종 브랜드 네임을 내건 향수를 출시한다. 각 브랜드가 갖고 있는 고유한 색채를 향이라는 강력한 도구로 고객에게 각인시키는 전략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 전략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메종마르지엘라는 M을 매개로 내 취향을 정확하게 바꿔놓았다.
M은 마르지엘라의 재즈클럽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남자였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엔 스스로를 열심히 속였던 기억이 있다. 그저 pas mal한(나쁘지 않은) 정도라고... 난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날 원했으니, 이 남자는 내가 앞으로 만날 미지의 왕자님들에 비해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정도라고 나를 속인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이 ‘나쁘지 않은’ 남자는 내가 앞으로 만날 수많은 왕자님들을 전혀 기대하지 않게 만들었다. 정확히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런데도 친구들 앞에서의 나는 M을 “오래 만난 여자친구가 있으면서도 나를(사실은 내 몸을?) 원하는, 정신 못 차린 27살“로 만들어 버린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혼자가 되면 또 그를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진짜 좋아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사랑은 원래 막 엄청 아름다운 거 아니었어? 이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독자의 마음을 두드리는 문학작품들이 셀 수 없이 쏟아질 만큼 예술적이고 깊은 마음 아니었냐고…..
그렇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프레베르의 Les Feuilles Mortes(낙엽)보다 에르노의 Passion simple(단순한 열정)에 가까웠다.
못 이기는 척 그의 집에 도착하면, 금기되었지만 아마 모두를 환영할 그곳에서 나는 발목에 족쇄를 찬 채 가장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옷과 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좀 더 원초적인 그와 내가 되기까지 모든 행동들이 음흉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본인의 취향을 설명할 때 그는 한없이 순수해진다. 고심해서 고른 페르시안 무드의 카펫을 열띠게 홍보하는 그의 모습이 내 사랑을 완성했다. 그가 샤워를 하러 가 잠시 혼자가 된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 카펫으로 발을 옮겨본다.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과 동시에 이 카펫을 밟았을 또 다른 여자들을 상상하면서.
M의 집에서 나와 지하철 역까지, 나는 길이 아닌 정돈된 용감함을 걸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 ‘저질러버린’ 행동들을 온몸에 욱여넣은 채 차분하게 걸었다. 학교로, 일터로, 뚜렷한 목적을 갖고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이방인만이 느낄 수 있는 오르가슴과 함께 걸었다. 지하철 칸 안에서는 어떤 얼굴로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표정을 짓기엔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으며, 미소를 짓기엔 충분히 배덕적이었으니까…..
하루는 이미 잘 알고 있던 자기의 취향을 벗겨낸 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 행거에 가지런히 정리된 옷을 잔뜩 빼와 내 앞에 쌓으며 하는 말, “너 비니 좋아하잖아, 이거 셀린느 건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 “너 스커트는 핏 하게 아우터는 박시하게 자주 입잖아. 우리 그때 얘기했던 인스타그램 빈티지 계정에서 샀어. 이 재킷 입어봐.” 그가 자신 있게 말한 나의 취향은 완벽한 오답이었다. 그의 앞에 선 나를 상상하며 완성한 아웃핏은 모조리 삐걱거렸고, 섹시함보다 형태의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내 고고한 패션 철학이 보란 듯이 뭉개지곤 했다. 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짧은 치마는 너한테 예뻐 보이려고 입은 거고. 아우터까지 슬림하면 너무 꾸민 티 날까 봐 무심한 척 루즈핏 입은 거야, 멍청아…..' 그래도 그의 향기가 가득 베인 옷들을 입고, 그와 같은 시선으로 거울을 볼 때면 나는 넘치게 행복했고 넘치게 기억했다. 그의 옷에서는 마르지엘라의 재즈클럽이 가득했다. 홍차와 가죽 향이 섞인 그 향수는 나의 겨울을 채우기에 충분히 조화로웠다.
또, 몇 번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라는 말에 설렘보다 당연함이 커질 때 난 다시 붕괴되었다. (내가 아는 그가 맞다면) 복잡하게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니겠지만 내 귀엔 바위만큼 무겁게 들렸다. 우리가 정말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의 집에 갈수록 점점 모든 것이 당연해졌다. 밝은 불에서는 서로를 볼 자신이 없어 어둡고 노랗게 켜놓은 간접등, 우디한 향기가 흠씬 풍기는 디퓨저, 엄청나게 많은 옷가지들이 걸려있는 행거, 서로를 부르던 유치한 별명, 품 안에서 맡는 기분 나쁜 담배 냄새, 그리고 내 허리를 잡아 자기에게 꼭 붙이는 손길까지도….. 온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던 내 긴장감도 결국 무뎌져 둥근 구가 되었고, 그렇게 그는 나의 오랜 습관이자 취향이 되어버렸다.
왜 몰랐을까? 거의 수직에 가까운 내리막인 M에게 눈치 없이 붙어있으려면 날카로운 발톱을 힘껏 내세워야 했음을. 다듬어지지 않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날것의 ’새내기 티’를 벗으면 안 됐음을. 내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그에게 내버린 짜릿한 상처를 즐기는 사람이었음을. 애써 깎아 매끈한 구가 된 나는 이제 그에게 닿기만 해도 저 아래로 미끄러졌다. 애초에 그와 나의 관계에서 일시정지 버튼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를 옷매무새에 빗댄다면 하루도 끊이지 않는 M의 연락은 예쁜 박음질이고, 또한 여자친구와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는 그는 뭉툭한 바늘이고, 곧 헤어질 거라며 내게 여자친구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 그를 마지막으로 - 정말 마지막으로 믿어보자고 선택하는 나는 실끼우개 일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프로 디자이너의 완전히 망쳐진 패션쇼다. 아마추어라는 면죄부도, 초심자의 행운도 없다. 다양하게 표현되는 모든 비난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프로 디자이너라면 그 정도의 무시와 선별은 필수적으로 견뎌야 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패션쇼를 처음 겪어본 나는 결코 프로일 수 없었다.
프로가 되는 법을 몰랐던 내가 지탱하기엔 어려운 관계였다. M에게 나는 평일의 여자고, M의 여자친구는 주말의 여자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참 아팠다. 몇 달에 걸친 회피는 영원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온 연락들을 차갑고 짧은 말풍선에 넣어 대충 다루다가… 이젠 완전히 무시해 버리자 마음먹었을 적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르노의 이별처럼 M의 존재와 부재만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나의 시간에서 제목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제목이 없는 삶과 생활과 나 자체를 받아들이기란 참 아픈 일이었다.
흘러간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젠 그 시간 속에서 단단해진 딱지들 속에 숨어 솔직해지려 한다. 가끔 여유가 생기면 M의 집 근처부터 지하철역까지 이어진 그 길을 걷곤 한다. 잠들기 전 샤워를 마치면 잊지 않고 양어깨에 재즈클럽을 뿌린다. 그리고 향기가 가져온 수많은 기억들을 섬세하게 만끽한다.
M이 디올의 향기 J’adore를 맡았을 때 떠올리는 내 모습은 어떨지….. 아직 놓지 못한 궁금함 속에서 잠에 든다. 그 궁금함에서는 슬픈 토바코 잎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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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프랑스 시인이 그렇듯 프레베르 역시 한국어 자료가 충분치 않기에, 제가 번역한 프레베르의 시 낙엽을 덧붙입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으니 뉘앙스에 집중해 주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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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베르 Prévert
저는 당신이 우리가 친구였던 그 행복한 날들을 기억하길 바라요
그때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태양도 더 뜨겁게 타올랐었죠
낙엽들이 참 많이 쌓여가요
제가 잊지 않았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겠죠
낙엽들이 참 많이 쌓여가요
추억들과 후회들도 같이 쌓여가네요
그럼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그것들을 추운 망각의 밤으로 실어갑니다
당신은 알고 있겠죠,
당신이 내게 불러주던 그 노래를 제가 잊지 않았다는 걸
그 노래는 우리를 닮았어요
당신은 날 사랑했고, 난 당신을 사랑했어요
우린 언제나 함께였지만 삶은 사랑했던 사람들을 갈라놓죠
아주 부드럽게, 조금의 소리도 없이…
바다는 모래 위에 남은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결국 지워내고 마네요
어떻게 제가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