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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Sep 08. 2023

열두 살 시계

시계방에서 만난 장인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햇살은 가시를 세웠지만, 가을 하늘은 맑은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산을 쓰고 두리번거리며 시계방을 찾았다. 큰길을 거의 다 훑었는데 찾는 건 없고, 빌딩에 붙은 형형색색의 간판들에 둘러싸여 있자니 어지럼증이 생겨서 벤치에 앉았다.


  내 힘으로 찾겠노라 다짐했는데, 어쩔 수 없이 지도앱을 켰다. 00 주얼리, 000 시계는 여럿 검색되는데, 그저 대리점 혹은 귀금속 상점일 뿐. 나이가 많아서 치료가 필요한 내 시계를 어루만져줄 장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찾았다! ‘시계약 바꾸러 옴’이라는 리뷰가 적힌 가게를. 적어도 시계 배터리를 직접 교체할 수 있는 분을 만날 수 있는 곳. 이미 지나쳐 온 길 건너편이었다.



  마침 가게문이 열렸고 체구가 작은 사장님께서 역시 작은 입간판을 세우고 계셨다. 시계 수리받으러 왔어요, 말씀드리니 다행히 반겨주셨다. 요 근래 내가 찾아간 곳들 중 수리 안 한다는 곳이 더 많았다. 대리점에 가면 정품 보증서를 가져와라, 본사 공장에 보내야 해서 2주는 걸린다, 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듣곤 했었다.


  “시계침 돌리는 나사 구멍으로 물이 들어갔나 보네요. 여기, 나사침에 녹이 슬어서 곧 부러지게 생겼어요.”

  고무장갑 안 끼고 시계를 한 채 설거지한 게 잘못이었다. 또 시계에 물이 찼던 거다. 일단 시계 내부를 말려야 한다며 작은 등을 켜면서 작업대에 앉으셨다. 주얼리 쇼윈도를 덮었던 천을 걷다만 채.


  작업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면봉, 이쑤시개, 세 가지 크기의 세촉 드라이버, 작은 붓, 쇠줄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고, 종이컵 여러 개에 내가 알지 못하는 작은 부속품들이 들어 있었다. 화려한 보석 진열대 바로 옆에 자리한, 장인의 수수하고 아담한 공간이었다.


  “아고, 시계유리가 그냥 빠지네요. 다시 붙여야겠어요.”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튜브 두 개를 꺼내셨다. 시계유리를 본체에 단단히 고정시켜 줄 접착제였다. 하나는 투명했고 다른 하나는 조금 부연 액체였다. 달력종이를 잘라 만든 메모지 위에 두 가지 본드를 한 방울씩 짠 후 이쑤시개로 섞으셨다. 내가 집에서 뿌염할 때 염색제 두 가지를 정성스레 섞듯.


  오른쪽 옆머리를 정성스레 반대쪽으로 빗어 넘겨 숱이 적은 정수리를 가린, 고풍스러운 머리 스타일. 반팔 셔츠에 양복바지, 발가락 양말에 지압슬리퍼를 신은 보통 아저씨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알았다. 이 분은 장인이란 걸.


 손톱은 0.5미리 이상 기르지 않고 항상 둥글게 다듬으시나 보다. 섬세한 작업을 하기 위한 단정하고 신중한 손이었다. 작은 돋보기를 왼쪽 안와에 끼우고 꼼꼼히 살펴보셨다. 시계유리 테두리에 붙은 오래된 접착제 찌꺼기를 긁어내고, 시계침 나사에 붙은 녹을 조심스럽게 긁어낸 후 오일을 바를 때에도. 배터리 교체 후 뚜껑 안쪽에 세촉 네임펜으로 오늘 날짜를 적으실 때도.


  첫 돌이었던 아이가 내 키만큼 성장하는 동안, 큐빅을 몇 개 잃었고 녹슬고 벌어진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가는 헌 시계이지만, 예전에 단종된 골동품이라 정품 대리점에서도 홀대받는 몸이지만, 내게는 소중하다. 스물일곱에 워킹맘이 되어 발을 동동거리던 나에게, 내가 했던 선물이었다.


  이직을 하더라도 시계 고칠 때는 이 동네에 와야겠다, 생각하면서 시계 수리 장인의 가게를 나왔다. 가을 햇살이 눈부셔서인지 몰라도, 열두 살 먹은 시계가 오늘은 세 살쯤 어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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