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한 대로 되지 않더라도, 네 인생 문제없어.
올 초, 애들 학교 보내놓고 같이 책 읽자, 짝짝짝 손뼉 치며 시작한 '글쓰담' 독서동아리. 이번에 같이 읽은 책은 장류진 작가의 「연수」였다.
서른이 되었는데 운전도 못 하냐, 뻔뻔하게 앞에 나서지도 못하냐, 쯧쯧, 아직도 번듯한 직장에 취직을 못 했니, 직장도 때려치우고 늦깎이 문예창작과 학생이 되었는데 글을 그 따위로 밖에 못 쓰니...... 단편소설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아직도'라는 질문에 시달렸다.
그들을 바라본다, 애잔한 눈빛으로.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다가 눈물이 핑 돈다, 어깨를 몇 번쯤 토닥여 주고 싶은데 손 닿지 않는 시절이라는 걸 아니까.
첫 번째 단편소설 '연수'에서, 주인공처럼 느꼈던 실패의 경험담이나 이를 극복한 이야기, 혹은 도와준 지인들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게요.
조용하지만 울림 있게 말하고 쓰시는 지초지현 작가님이, 역시 이번에도 작가님답게 발제하셨다. 우리는 평소보다 긴 시간을, 울다가 웃다가, 또 눈물 훔치다 박장대소하며 이야기 나눴다. 이 발제의 울림이 어찌나 깊었던지, 몇몇 작가님들은 즉답을 피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실패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뜻한 대로 되지 않고 그르친 것'이다. 가만있자, 주인공처럼 무언가 간절히 잘하고 싶은데 이루지 못한 것, 자꾸 생각나고 찝찝한 '실패'의 경험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전거 타기'와 '수영'이었다.
신입 간호사 시절이었다. 마침 쉬는 날이 맞았던 Y와 나는, 각자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공원에 나와서 자전거를 빌렸다. Y는 반드시 오늘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고, 그 모습에 감동받아 나도 반드시 배우고야 말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5살 때 친척 언니의 두 발 자전거를 빌려 타다가, 시멘트를 헤집어 놓은 길에서 넘어져 무릎이 찢어진 후로, 나는 자전거 타기를 꺼렸다. 이제는 다쳤던 기억도, 수술 흉터도 희미한데 자전거 안장에 앉아 핸들을 꽉 쥐고 나면, 당최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나는 역시 안 돼, 미안하지만 글렀어, 자전거 못 타도 운전은 잘해, 튼튼한 두 다리로 잘 걷는다고.'
그날 Y는 나보다 더 애석해했다. 17년이 흐른 지금은, 두 아이들이 더 애석해한다.
"엄마는 자전거 언제 배울 거예요, 엄청 쉬워요, 내가 가르쳐 준다고요."
그래도 소용없다. 아들아, 이 엄마는 괜찮단다.
수영도 마찬가지였다. 사관학교 3학년 때 해양간호실습을 가게 됐다. 야외 수영장에서 다이빙, 스쿠바를 배우고 10미터 잠수도 해야 했다. '울릉도 물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물과 친숙해질 기회가 없었기에,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영이란 걸 배웠다. 그것도 3주 동안 평영까지, 속성으로 마스터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수영 배우기도 바쁜 시간에 수영장 물을 부지런히 들이켰는지, 장염에 걸려 죽만 먹고 매일 물질을 하니 죽을 맛이었다. 결국 배영까지 엉성하게 배우고, 씁쓸하게 강습을 마무리했다. 다이빙, 스쿠바를 하면서는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절대 해군에 가면 안 되는 사람임을.
'연수' 편에 그려진 운전 실패의 경험은, 서른 남짓까지 큰 실패 없이 살아온 주인공에게 작은 오점에 불과하다. 유일하게 씁쓸한 감정을 맛보게 한 사건, 혼자 떠올리거나 누구에게 말하려고 할 때만 갑자기 밀려오는 창피함 정도. 생계로 운전해야 하거나, 재난상황에서 자동차로 탈출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 것도, 대중교통이라곤 꿈도 못 꾸는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서른에 맞닥뜨린 실패란 그런 것이었다. 자전거를 못 타니 '라이딩 크루' 편에 등장하는 자전거 동호회 따윈 꿈도 못 꾸지만, 자전거를 못 탄다고 밥을 굶거나 내 정체성이 뒤흔들리는 건 아니었다.
진짜는 그 뒤에 등장한다. '동계올림픽' 편에 그려진, 어느 인턴 기자의 하루는 스스로 실패라고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어느 실패보다 처절하다. 어린 시절부터 과한 기대와 헛된 바람으로 일관하는 부모, 이름 없는 방송사 인턴 따위에게는 아량을 베푸는 척도 안 하는 사회. 주인공은 그 속에서 태어나 살아왔기에, 오늘도 그저 쩔쩔매다가 추위에 까무러치고 나서야, 희미한 의식의 힘을 빌어 도움을 청했다.
16년 간 직업군인으로 전국을 누비며 워킹맘으로 쫓기듯 살면서, 그게 힘든 줄 몰랐다. 다들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 큰 아이 7살 때 휴직을 하고 주변 엄마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친정 근처 동네에 아파트 한 채 사서, 자기 취향대로 집을 꾸며 놓고 정착하고, 애들 고등학교까지 전학없이 마치도록 한다는 걸. 아이 돌보는 분께 월급을 통째로 바쳐가며 힘들게 직장 생활하느니, 진작에 일을 그만둔다는 것도.
이십 대의 나는 불만이 많았다. 왜,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일까? 연차가 차고 저 정도 직급에 올라갔는데 후배들을 이끌어 주지는 못할망정, 밟고 올라서려고만 하고, 제 입안에 혀처럼 놀며 뺀질거리는 후배들만 싸고돌다니. 저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것들이 판을 치니, 여기는 글러 먹었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삼십 대의 나는 꿈꿨다. '이십 대의 나'와 같을 후배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자, 내가 그 직급이 되면 기필코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마,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후배들은 나와 달랐다. 그들이 무얼 힘들어하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고, 어떻게 해야 그들이 기꺼이 움직이도록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착하고 우직한 선배'일 수는 있었지만 '멋진 선배'는 될 수 없었다.
'공모' 편에 등장하는 '차장'과 '팀장'처럼,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서른에 고집하던 개똥철학 따위는 내동댕이칠 수 있었어야 했다. 결국 '멋진 관리자'로 사십 대를 맞는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창피하고 아쉬운 장면들을 실패라고 부르지 않겠다. 처음에는 조금 부끄럽고 슬프고 위축되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 수많은 꿈과 도전이 있었기에, 때로는 뿌듯하고 때로는 부끄러운, 반듯한 곳도 찌그러진 곳도 있는 나름의 결과물을 얻었다.
그걸 나만의 색깔, 내공, 경험치라 부르겠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털고 일어나서 씩씩하게 여기까지 왔네, 어깨를 펴고 우렁차게 말하며 껄껄 웃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