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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Dec 04. 2022

學(학)부모 유감

입시설명회 홍수 속에서

 주문을 외워본다. 스카이 서성한 중경외시 현역합격 내신1등급 수능대박. 이 땅에 사는 '그냥 엄빠' 아닌 학부모라면 한 번쯤은 외워봤을 법한 절절한 주문을. 이 기도의 집단 부흥회 버전이 바로 입시설명회다. 찬바람이 솔솔 부는 시기가 되면 전국 방방곡곡, 주말마다 입시설명회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수능시험 직후에 정점을 찍는다. 급기야 요즘에는 코로나19 덕분에 급부상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평일 저녁에도 훅 치고 들어온다.


 내가 여기 매달리게 된 역사는 아이들이 걸음마를 떼던 시기, 육아박람회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게 읽히면 좋다는 책, 영어책을 읽어주는 기기, 심지어 놀면서도 뭘 배우게 해 준다는 장난감, 두뇌 발달에 좋은 분유와 이유식까지 초보 엄마의 눈을 돌아가게 했다. 고백하자면, 우리 큰 애는 태중에서부터 꼼짝없이 엄마가 읽어주는 "까이유(Cailou)" 영어책을 들어야 했다(구린 발음은 덤). 아가야, 태어나면 그때부터 경쟁은 시작되는 거야. 영화 미저리에서나 들어봤음직한 류의 속삭임이었다.


 유아교육 명사가 웬일로 대전까지 내려와 "공짜로" 해 준다는 강연에 갔었다. 여기에 솔깃한 짠순이 극성 엄마는 강연 주최가 어딘지 볼 정신이 없었다. 난데없이 보험에 가입하라는 설교를 1시간 반쯤 견뎌내고 울며 겨자 먹기로 개인정보를 적어낸 후에야 명사의 짤막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보험 광고에 진을 뺐던지 강의 내용은 기억도 안 났다. 그때 이를 갈면서 이런 행사에는 두 번 다시 안 오리,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아이들이 '학생'이 되고 나니 시끄럽게 고교학점제다, 역대급 불수능이다, 수학이 대세다, 문해력이 어쩌고 하며 순진무구한 '학부모'의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엄마 치맛바람 덕에 잘 먹고 잘 사는 친구들을 보며 내 부모의 '극성'이 부족함을 탓했던 나로서, 이런 불안감을 잠재울 방법은 어쭙잖게 터득된 극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영어 유치원에 2년 치 연봉을 털어 넣었으나 그 만족감을 아직도 느끼는 나는 이번에는 수학이다, 다음에는 국어다를 외치며 여기저기 휩쓸려 다녔다.


 큰 애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엄마 설명회 다녀올게."는 한 차례 푸닥거리의 예고임을 우리 아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날도 설명회에서 '거실 TV를 치우고 독서실로 만들어라', '학원과 숙제를 제외한 순수 공부시간을 매일 2시간 이상 확보하라" 등 무시무시한 지령을 받고 비장하게 돌아온 엄마가 아이들을 집합시켰다. 스터디 플래너, 문제집, 태블릿 학습기기 점검이 이어졌다. 플래너 미기입과 계획 미실행, 국어문제집 안 품, 영어 숙제 밀림, 수학 인터넷 강의 빼먹음, 노트북으로 유튜브만 주야장천 봄, 숙제도 안 하고 게임함. 적발된 건수만 10여 건. 찾으려면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열심히 해 볼게요."라는 볼멘 다짐을 받아낸 후에야 당최 끝이 안 보이던 취조가 끝났다.


 실은 엄마도 답답하다. 애들은 나보다 더 잘 살았으면 좋겠고, 뭘 해야 잘 살게 되는지 답을 못 찾았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보다 잘 알 테지, 이거라도 해 보는 수밖에. '나 때'는 엉덩이로 공부하면 그나마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었는데, 5년 전 우연히 대학 입시 담당자로 학생부 종합 전형 업무에 어설프게 발 담가 보니 이제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었다. 고등학교 2년 반 동안 공부하기도 바빴을 텐데, 독서, 교과활동, 학생회, 봉사활동 등으로 학생부를 30~40페이지나 채우고도 모자라 자기소개서*, 면접 등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했다. 남 일 같지 않아 겁이 났다. 이걸 하려면 학부모는 분명 매니저가 되어야 할 터. 애가 둘이니 남편과 내가 직업을 바꿔야 할 판이다.


 '학부모'들의 입시문의 전화로 목에서 쉰소리가 나고 반쯤 미쳐가던 그때, 신문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삼성 입사 부서에 부모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친다는 거였다.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끝이 없는 '학부모질'이여. 이런 사람들, 나는 비난 못 한다. 나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장담 못 하니까.


 요즘도 한 주가 멀다 하고 주말마다 '특목 자사고'와 학원 설명회에 다닌다. 평일에도 줌(ZOOM)이나 유튜브(YOUTUBE)로 꼭 챙겨본다. 그나마 발전한 건, 설명회 다녀오자마자 말도 안 되는 지령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쏟아붓지는 않는다는 것. 순둥이 큰 아이가 사춘기가 되고, 이제는 자기가 납득하지 못하면 절대 실행하지 않는 뚝심이 있음을 깨닫고, 나란 학부모도 달라져야 했다. 14살 인생에 유일한 낙인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도 허용하고 유튜브로 '호미들', '창모' 힙합도 들을 수 있게 하면서, 엄마가 가라는 학원도 가고 숙제도 할 수 있도록 타협하는 거다. 입시설명회는 입시설명회일 뿐. 내 아이는 내가 가장 잘 알아야 한다. 그게 내가 근래 터득한 '학부모'의 도()이다.


* 2024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자기소개서 전면 폐지가 결정되었고 점차 자소서를 요구하는 대학이 줄어들고 있단다. 그 간 대입 제도의 변천사가 파란만장했던 걸 생각해 보면, 언제 자소서가 부활할지, 자소서 이상의 무언가가 언제 등장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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