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장사, 그 잡채
영어학원, 이것만은 꼭 알고 선택하세요.
밤 11시에 잠이 싹 달아났다. 심장이 쿵쾅쿵쾅,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놈들이 내 동생을 불안의 늪으로 끌어들인 거다. 급하게 파리행 3장, 로마발 3장의 항공권을 취소했다. 취소 수수료만 50만 원. 그다음은 유레일 패스. 이 놈들도 도둑놈인 게 두 달 가까이 남은 탑승권에서 15%나 차감한 금액만 돌려줬다. 게다가 기차 좌석 예약 비용은 일절 안 돌려준단다. 제기랄, 욕이 절로 나온다. 애들하고 유럽에 한 달 동안 놀러 가는 꿈만 꿔 봤고, 큰 애 겨울방학 영어 특강 보내기 위해 마음 바꾸었다고 1,708,260원을 지불해야 하다니. 내가 아는 욕을 총동원해서 이 숫자를 저주했다.
동생의 사정은 이러했다. 언니네처럼 맞벌이가 아니었기에 내 애들은 영어유치원에 못 보냈고 영어 과외 한 번 못 시켜 줬다. 언니가 아동용 영어 원서 전집과 CD를 물려주고 EBS '초등 목표 달성' 영어를 권유했지만, 아직 어려 손이 많이 가는 막내까지 챙기면서 온전한 엄마표 영어를 하는 건 능력 밖이었다. 그 대신 아파트 상가에 있는 영어도서관이라도 꾸준히 챙겨 보내고 태블릿 학습도 시켰다. 그게 최선이었다. 한창 꾸미고 싶은 30대에, 한 가정의 'CEO'라는 중압감으로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어야 했지만, 사회생활하는 남편과 나날이 크는 애들 입을 거리는 사시사철 챙겼고, 그 와중에 애들 사교육까지 알뜰하게 시킨 거다. 언니가 전셋집을 전전하며 영어학원에 연봉을 갔다 바치는 동안, 동생은 20년 된 아파트라도 한 채 사서 자리를 잡았다.
"언니, 미안해. 이번 방학 특강 듣고 레벨을 조금이라도 올려야 한대. 이미 늦었대. 몇 백 손해 봐도 어쩔 수 없어, 이 방법밖에는."
동생아, 그 방법만 있는 게 아니야, 설득을 시도했지만 동생은 마음을 굳힌 뒤였다. 아니, 절망한 나머지 내 말이 안 들리는 상태였다. 열심히 산 내 동생이 뭘 잘못했기에, 아이가 뒤쳐져서 따라잡기 어려울 수 있다며, 땅을 치고 후회해야 하는 거지? 일주일 가족 식비라며 10만 원에 덜덜 떠는 우리가, 앉은자리에서 170만 원이나 손해 봐야 하는 거지? 10살 조카는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일주일 내내 레벨테스트에 시달린 끝에 열등감으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거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아니 그걸로 부족해 삿대질도 곁들이겠다. 교육이 언제부터 장사가 되었으며, 무슨 자격으로 멀쩡한 모녀를 등신 취급하는 건가 말이다. 그동안 내 애들 키우느라 바빠서 입 다물고 있었는데, 말 나온 김에 당신들이 말하는 영어 공부의 '왕도', 당신들이 신봉한다지만 믿거나 말거나 한 '레벨', 당신들이 실패하기 싫어서 설정한 비겁한 '문턱'에 대해 좀 따져보자.
영어는 언어다.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아빠가 읽어 준 동화책, 엄마의 자장가, 친구들과의 잡담, 길 가다 보게 되는 간판, 그림책에서 본 짧은 문장.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듣고 보고 읽고, 더듬더듬 끄적끄적 흉내 내다보면 익혀지는 것이다. 원래는 그랬다. 학교 내신 점수, 수능 점수를 잘 받아야 해서 일상에서 쓰지도 않는 영어를 '공부'하게 되기 전까지는. 영국 출판사가 찍어낸 세계 지도책 부록을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어와 영어가 공용 언어라고 쓰여 있었다. 무슨 소리야, 처음에는 부정했다. 교통표지판, 간판에도 영어가 즐비하고, 원어민이 풀어봐도 틀리는 영어문제를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서 어린 학생들이 척척 풀어낸다니, 우리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뒤늦게 이해가 되었다.
일상에서 언어로 사용하지 않는, 죽은 언어를 심폐 소생하여 자녀가 기어이 점수를 따내도록 만드는 굳센 엄마. 그게 나와 내 동생이다. 그런 우리가 의지하며 때로는 기꺼이 속아 주는 존재가 영어 사교육이다. 물론 내가 만난 영어 사교육이 모두 '영어 장사'는 아니었다. 작은 규모였는데도 불우한 아이를 무상으로 교육받게 할 정도로 이윤을 따지지 않고 교육에 쏟아부은 원장님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영어 첫 발을 잘 내디뎠다. 집에서 안 쓰는 영어를 효과적으로 익힐 수 있게 내실 있는 프로그램으로 가르쳤던 두 번째 영어학원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영어 학습'을 몸에 익혔다. 정말 애석한 건, 이런 학원들은 경영이 어려워져 2년을 못 넘기고 문을 닫게 되더라는 거다.
영어유치원, 학원을 옮기느라 여러 학원에 가 보고 여러 원장을 만나보고 여러 군데 아이를 보내 보면서 서서히 장사꾼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 첫째, 영어를 잘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주입한다. 그게 직설적이든 은유적이든 엄마들이 자신에게 매달리도록 영어 공부의 본질을 오도(汚塗)한다. 엄마표를 하다가 '구려진' 발음을 힘들게 고쳐주고, 다른 학원에 다니다가 생긴 '구멍'을 메워주고, 영어공부에 소홀했던 아이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단어를 외우게 되는 등 개과천선을 시켰네, 하는 무용담을 흥미진진, 쫄깃하게 들려준다.
둘째, 학원 등록 전에 딱 한 번 치른 레벨 테스트 점수로 아이의 수준을 단정하고 가능성은 철저히 짓밟는다. 그 나이에 '실력'을 갖춘 아이가 몇이나 되겠으며, 그 시험이 '비원어민'의 영어실력을 얼마나 타당하고 공명정대하게 측정해 주는지, 나 같은 비전문가는 모른다. 수치라는 객관성을 그럴 싸하게 차려입은 점수, 심지어 소수점까지 나오는 SR인지 AR인지 '독서지수'를 들이밀며 아이의 현재 레벨을 단정 짓는다. 영양가가 어떻든 마블링 등급으로 고깃값을 정하듯, 일상에서 쓰지 않는 외계어로 된 문제를 얼마나 잘 때려 맞추는가에 따라서 신속 간편하게 별점을 매긴다.
첫 번째는 교육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학부모에게 선택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자기 홍보라고 치자. 두 번째는 아이의 학습 수준을 이해하고 적절한 학습전략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진단평가'라고 백보 양보하자. 영어 사교육에서 제법 뒹굴어 본 내가, 아무리 이해해 보고 싶어도 못 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검증 안 된 등급만으로 자기 학원에 등록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통보하는 거다.
이곳 브런치처럼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뫼실 수 없게 되었다"며 예의라도 표해주면 고마워해야 한다. 대부분 시한부 선고를 내리듯 단호하고 박하게, 다른 학원 알아보시죠, 아이가 4학년이라도 영어는 1학년 반에 다녀야겠네요, 허허, 이렇게 비수를 꽂는다. 5살이나 되었을까, 어린아이를 놓고 "점수가 좀 부족하지만 첫 수업 전에 엄마가 파닉스를 떼 주고 보내면 받아는 주겠다"는 주객전도된 요구를 하는 곳도 봤다. 물론 이런 학원에는 두 번 다시 발걸음 안 했다.
예끼, 이 사람들아. 아이들 '레벨'에 맞게 가르칠 자신이 없거든 차라리 가르칠 능력이 부족해서 미안하다고, 솔직히 말해라. 아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키워주는 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이끌어 주는 게 교육이 아니냐. 영어권 국가 체류로, 해외 연수로, 엄마표 영어로, 이미 완성된 실력을 갖춘 아이들을 데려다가 너희들이 다 키운 것처럼 사기 치는 거냐. 당신들을 교육자가 아닌 장사꾼이라 부르겠다. 알뜰살뜰 자기 꿈도 접어 가며 꿈나무들을 키우는 위대한 엄마들을 폄하하지 마라. 커서 무엇이 될지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깜냥도 안 되면서 진단하지 말라 이거다.
* Photo by Cash Macanay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