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엄마가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느끼고 반성한 점
11살 아이가 지방간이라니, 간호사 엄마는 한없이 부끄럽다. KBS에서 방영했던 긴급구조 119 프로그램에서 탄산음료를 입에 달고 살던 아이가 간경변으로 쓰러졌던 사례를 보며 혀를 끌끌 찼었다. 부모가 어쩌자고 탄산음료를 달고 살게 내 버려두었냐고.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일이 내 아이에게 일어났으니, 엄마인 나의 잘못에 다시 혀를 차야 하는 걸까, 부끄럽기 그지없다.
귀여운 막둥이는 의사표현을 할 줄 알던 아기 때부터 딸기주스, 뽀로로 음료수를 좋아하던 아이였다. 물론 최대 하루 1잔으로 양을 제한했지만, 입에 단 걸 막는 이유를 어린아이에게 알아듣게 얘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입이 짧고 음식을 많이 가리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작년 초부터 하루에 네 끼, 중간에 간식까지 챙겨가며 먹어 주니, 반가운 마음에 아이의 식단 관리에 느슨해졌던 게 사실이다.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컵라면을 사 먹거나 학교 정문 앞 떡볶이집에서 컵떡볶이를 먹고 오기도 했다. 아이가 부쩍 자란 것 같은 뿌듯한 마음에, 과도한 간식을 멈추게 해야 했던 때를 놓쳤다. 아이는 생후 10개월 이후 저체중에 가까운 가냘픈 몸매로 살았는데, 올 가을이 되니 턱선이 둥글둥글해지고 볼이 빵빵해져 보조개도 얕아졌다. 아무리 성장기라고 해도, 근 1년 만에 체중이 7kg 가까이 는 건 정상으로 보기 어렵다.
잘 먹기 시작하자 방과 후 교실에 등록하여 주 4회 축구, 농구를 했었는데, 여름철부터 발뒤꿈치 통증이 심해져 그만두게 되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뼈가 급속히 자라면서 종아리 근육에 붙은 아킬레스건이 발뒤꿈치 뼈를 잡아당기는 모양새가 되면서 성장판에 염증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활동량은 줄었는데 먹성은 그대로였고, 그 먹성에 부응하는 엄마의 영양공급이 뒷받침되어 이 사달이 난 것이니 적어도 절반은 내 탓이었다.
찬바람이 불면서부터는 부쩍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했고,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빈혈인가, 그럴 리 없으면 좋겠지만 뇌에, 혹시 간에 문제가 있는 건가. 간호사로 일하는 십수 년 간 소아 환자는 다섯명쯤, 그것도 응급실에서 잠시 만나본 게 다였기 때문에 아는 바가 없지만, 내 아이가 아프다니 이런저런 가설을 들이대 본다. 아이 손을 잡고 동네 소아과를 찾았다.
우리 지역에서는 나름의 역사를 자랑하는 2차 병원에서 소아과 과장을 하다가 개업한 의사였고, 새 아파트가 들어선 동네인 덕도 있는 건지, 매번 아이 환자들이 넘치는 걸 본다. 나보다 10년쯤 인생 선배일 듯 보이는 얼굴에, 하루 종일 밀려있는 환자들을 상대하느라 분주함과 피곤함이 엿보였다. 내가 그간의 이야기를 하려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다. 내 말 도중 의사가 속히 진단을 내리기 위한 질문들로 툭툭치고 들어온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환자가 많은데 이 엄마는 유난히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다고, 그의 표정이 말한다.
결론은 혈액검사를 해 보자는 것. 오늘날 의학은 검사결과로 말한다. 나도 그런 사정은 알고 있지만, 진료실에 우리 아이의 상황을 되도록 잘 전달하고 싶었다. 의사도 힘들고 환자나 보호자도 힘들다. 둘 다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며 다음 환자를 위해 이 만남은 일단락 짓는다.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의사의 시간을 절약해 주기 위해서 예진 간호사를 두어,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에 환자가 병원을 찾은 이유와 불편감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간호사가 면담 정보를 요약하여 진료실에 전달하면, 의사는 추가 정보만 확인하고 더 효율적인 진료를 할 수 있다. 인건비가 추가로 들어 어렵다면, 환자가 진료실에서 무얼 물어보고 답해야 할지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질문지나 체크리스트를 제공하였으면 좋겠다.
환자가 의료진과 대화하는 것은, 그가 질병 자체나 치료방침을 이해하고 일상에서 스스로 건강지침을 실천할 수 있는 올바른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의사에게 제대로 정보를 요구하고 질문할 수 있게 '유도'하는 목록을 'Question Prompt List'라고 한다. 다양한 현장에서 개발한 ‘Question Prompt List' 연구가 꽤 있는데 실제로 얼마나 활용되는지는 모르겠다. 연구가 아니더라도 매일 같은 걸 묻고 질문받다 보면 진료실에 있는 분들은 앉은자리에서 자기 진료에 쓸 'Question Prompt List'를 만들 수 있을 거다.
의료진의 관점에서 필요한 것들만 묻고 확인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정보를 놓칠 수 있다.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점쟁이가 아닌 이상, 수분만에 환자보다 그의 증상이나 경험을 잘 파악할 수 있을까. 환자나 보호자가 효과적인 진료를 위한 조력자, 나아가 '주체'가 되려면 의료진과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도록 전문가인 의료진이 도와야 한다.
오늘 중학생 아들과 대학병원 성장클리닉에 갔는데, 같은 의료진이니 아마도 별의별 환자를 대하느라 힘들었을 상황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진료실에서 상당히 불편했다. 의사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달리 심기가 불편해 보였고 처음 만난 간호사는 강한 인상을 풍겼다. 작은 아이와 이미 경험했던 터라 성장클리닉 초진에서 고환 크기를 의사가 직접 평가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수용하며 키운 탓도 있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주관이 강하다. 산들바람에도 저절로 눕는 '순둥이 초식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춘기가 되니 아이들의 본색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까. 태아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임산부가 질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그건 의사라는 '직업이 하는 일'이라고 빗대어 가며, 너도 정확한 진료를 위해 전문가에게 고환 검진을 받는 거라고 진료 전에 충분히 타일렀지만, 아이는 신체검진을 완강히 거부했다.
"지난번 작은 아이와 오셨을 때 경험하셨을 테니, 고환 검진한다는 걸 아셨을 테고, 어머니가 충분히 아이에게 설명을 하셨어야죠. 고환 크기를 확인하지 않으면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없어요."
맞는 말이다. 성호르몬 검사결과와 고환 크기 등 데이터가 있어야 과학적인 진료가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아닌 엄마가, 아이에게 검사의 필요성을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이후로, 아이가 진료를 받을 때 의사의 질문에 답하는 건 더 이상 내가 아니다. 환자는 엄마가 아닌 아이이기 때문이다. 말을 못 하는 아기도 아니고, 엄마는 제삼자로 관찰한 것을 보태어 줄 뿐, 아이가 증상을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검사가 왜 필요한지 의사에게 설명을 듣고 그에 동의하는 것도 일차적으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의 신체를 검진하는 것도 아이가 동의해야 하고, 그걸 엄마가 아이에게 강요하거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사춘기가 되어 자의식도 강해지고 옷 갈아입는 모습을 가족에게도.보여주기 싫어하는 아이들인데,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이가 생식기를 검진하도록 맡기는 것이 쉬울까. 그렇기에 의사가 엄마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라고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오늘 진료의 주인공은 의사와 아이라는 나의 신념은 그대로다.
집에서 가까운 큰 병원이니 내가 자주 가고 싶은 병원으로 남아주길 바라며, 내일 '고객의 소리' 설문 링크가 오면 의견을 내려고 한다. 성장클리닉 첫 진료를 앞둔 환자나 보호자에게 반드시, 고환 크기를 확인하는 신체 검진을 받게 되니 아이가 이에 동의하는 경우에만 진료가 가능하다던지, 고환 검진 없이 진료는 볼 수 있더라도 정확한 진단은 어렵다는 걸, 미리 밝히라고 말이다.
의료서비스의 소비자로서, 그리고 의료인으로서 외쳐 본다. 환자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부르짖는다면, 환자가 올바로 묻고 답할 권리부터 지켜주도록 노력하자. 더구나 그 환자가 미성년이라면 아이가 소중한 고객으로서 마땅히 누릴 권리를 누리도록, 의료진이기에 앞서 어른으로서 솔선수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