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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간 Sep 12. 2024

나약한 인간이 하루를 완벽하게 만드는 법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가끔 어떤 작품에서 너무 큰 감동을 받으면 며칠간 헤어 나오질 못한다. 글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이 영화의 리뷰이자 감상을 적은 낙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수의 글자를 남겼다. 그리고 그대로 지웠다. 나만의 글을 써야 하는데, 영화의 반의 반도 따라가지 못할 글로 보였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퍼펙트 데이즈 영화 꼭 보세요.’라고 한 줄 적는 게 더 의미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 머리를 비워내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바람도 안 드는 책상에 앉아 큰 노트를 펼쳤다. 이 기분의 끝을 보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겠다 생각했다. 위대한 창작자들에 비해 나태한 나에게 주는 벌이다. 한참이고 영화를 곱씹으며 생각해 보았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지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영화라고들 한다. 나도 동의한다. 보이지도 않는 학원 숙제에 초점을 맞추고 걸어가는 아이에게 나도 이 영화를 설명해 주었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 하늘과 나무만 보더라도 행복해지고 감동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가슴의 먹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도 나름 주인공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찾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이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도 슬픈 걸까. 왜 주인공의 미소를 보며 가슴이 미어질까.

주인공은 점심마다 작은 언덕 신사에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간다. 주머니에는 오래된 필름 카메라가 있다. 매번 같은 벤치에 앉아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나무를 본다. 주변의 크고 울창한 나무보다는 야위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멋이 없거나 풍경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나이 든 주인공이 그 나무의 성장을 지켜봤을 것 같은 정도의 크기다. 자리에 앉아 흔들리는 나뭇잎에 햇살이 내리쬐는 것을 웃으며 지켜본다. 보는 나도 행복하다. 그리고 뷰파인더도 보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1주일 후에 그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른 채. 일주일 후 잘 나온 사진만 추려서 모아 보관한다.


영화에서 본 것과 같은 순간을 떠올렸다.  




1년 조금 더 되었다. 날은 다행히도 계속 무더웠다. 시원하면 손가락 발가락이 저릴 수 있다고 했는데, 약간 찌릿함을 느껴 다가올 추위가 걱정됐다. 기운도 없고, 속은 울렁거렸다. 많이 걷는 것 말고 할 게 없었다. 다행히 집 바로 옆에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었다. 조금만 걸어도 헐렁한 모자가 땀으로 가득했다. 머리카락이 땀을 덜 나게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붉은색 길은 조금이라도 길어 보이고자 구불구불 휘어있고, 심은지 얼마 안 된 앙상한 나무들을 끼고 있다. 몇 미터 올라가면 벤치가 있는 좁은 공간이 있는데, 사람이 눕지 말라고 우악스럽게 덧 데어진 쇠 팔걸이들 사이사이는 고양이들이 눕기에 딱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그 흉폭한 벤치가 정자 아래에서도 띄엄띄엄 앉기를 강요한다. 맞은편에는 딱 하나 그 팔걸이가 뜯긴 벤치가 햇살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있다. 거기엔 겨울 옷을 입은 분이 봄 여름 가을 항상 누워있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하고 있다.  


조심스레 그 두 공간을 지나,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기분 좋은 길을 몇 미터 지난다. 그리고 스무 개의 돌계단이 나타난다. 체력단련을 하는 학생들이 계단을 뛰어 오르락내리락한다. 그 옆으로 모자의 땀자국과 눈동자만 선명한 내가 지나간다. 한 계단을 올랐을 때 마음으로는 이미 정상에 올랐다. 몸은 마음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고개를 든다. 상체가 펴지고 발도 조금이나마 따라온다. 한 발을 다음 계단에 올려둔다. 숨을 잠깐 참으며 아래 붙어있는 다른 발을 당겨온다. 두 발이 만나 숨을 내쉬어본다. 한개의 계단을 다올랐다. 탄식이자 한숨이자 호흡인 소리가 내 두개골을 올린다.


다음 걸음을 위해 고개를 들다 하늘을 보게 되었다. 햇살이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치고 있었다. 시시각각 명도가 변하는 나뭇잎들 사이로 무슨 색이라 부를 수 없는 빛이 일렁인다. 찬란하게 아름답다.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보았다. 잎들을 지나지치 못한 햇살이 바닥에 그림자를 흩뿌리고 있었다. 찬란한 그 빛의 흑백사진처럼.


생각이 바뀌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드는 건 하늘을 보기 위해서, 그다음 발을 둘 곳을 보러 고개를 숙이는 것은 계단에 흩날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기 위함으로. 그렇게 남은 계단을 순식간에 지나갔다. 옆의 학생들도 나를 순식간에 여러 번 지나쳤겠지만 내 시야에 없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여기를 올랐다.


나도 매일 사진을 많이 찍었다. 보고 있으면 매일 다른 풍경이라 간직하고 싶어졌다. 날씨에 따라, 하늘에 있는 구름에 따라, 아니면 내가 나온 시간에 따라 달라졌다. 주인공만큼 부지런하지 않아 같은 시간에 나오지 못했지만, 그 덕에 조금씩 다른 기울기의 그림자도 보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이 즐거움으로 계단을 올랐고, 어느새 숨소리도 발의 무게도 걱정할 필요 없어졌다. 체력단련 하는 학생들은 더 이상 나를 지나쳐 가지 못했다.


나도 행복했다. 영화 주인공처럼 분명 행복했다. 햇살을 흠뻑 먹어 나뭇잎이 보여주는 청량한 색, 그 뒤로 보이는 파란 하늘, 바닥에 흩날리는 그림자와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들. 심지어 그 햇살이 비추는 돌의 질감까지도. 어쩌다가 떨어진 낙엽에 햇살이 비치면 예술이 따로 없었다. 우연과 자연이 함께 만든 작품. 초록색 나뭇잎이 남아있고, 날씨만 맑다면 행복과 완벽한 순간은 멀지 않았다. 


우연과 자연이 만든 작품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슬픈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는 알고있다. 세상엔 이 말고도 행복한 게 많다는 것을. 긍정적인 건 좋다. 어디서든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좋다. 내가 목표한 대로의 완벽한 하루를 누군가 건들지만 않는다면 그 루틴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슬펐다. 마치 그 하나의 행복에 내 목숨을 걸고 목숨을 살리려 애썼던 시간이 생각나서.




회사원 한 명이 주인공 옆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주인공은 가볍게 인사를 하지만 그 회사원은 매일 보는데도 뚱한 표정으로 보다 만다. 주인공의 조카는 옆에 앉아 같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무를 보고 행복해한다. 주인공은 조카의 사진을 찍는데, 뷰파인더를 보고 찍는다. 행복한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 순간, 그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 사람의 웃는 순간, 서로 교감하는 그 순간까지. 그런 행복을 어쩌면 포기한 주인공은 멋진 사진을 뽑기하듯 나무를 찍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후에 조카와 그날 찍은 사진들을 다른 때와 달리 확인도 하지 않고 전부 추억 보관함에 던져 넣는다.




버틸 수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긍정적으로 살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너무 좋다. 그렇게 항상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너무나 약하다. 아플 수도, 무언가 일이 뜻대로 안 될 수도, 외로울 수도, 내 인생이 생각과는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 내가 완벽히 통제하고 아무런 변수도 없는 삶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들 알지 않는가. 그런 삶은 사실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행복을 찾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인지 모른다. 울면서만 살 순 없으니까. 운다고 계단을 오르지 않을 수 없으니까. 무엇이라도 붙잡고 미소 지어야 덜 힘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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