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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간 Sep 19. 2024

나약한 인간이 하루를 완벽하게 만드는 법 2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쓱싹쓱싹. 쓱싹쓱싹. 

밖에서 빗자루 소리가 크지도 작지도 않게 들린다. 이사 와서 처음 듣는 것 같다. 바닥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한 소리에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났다. 감은 눈꺼풀 건너 햇살이 느껴진다. 영화 속 장면과 너무도 닮았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라도 주인공에게 행복한 순간들은 많다. 책을 읽다 잠이 들고나면, 그 행복한 하루의 하이라이트가 꿈으로 펼쳐진다. 일단 반은 햇살에 비친 나뭇잎 물결이 채운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배경 사이 반복되는 하루의 틈새에 들어온 행복한 순간들이 겹쳐 보인다. 엄마를 찾아줘 고마워한 아이의 인사, 직장 동료가 짝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카세트테이프를 들었던 기억, 화장실 구석에 숨겨둔 퍼즐 게임 종이, 조카와의 즐거운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너무 짧게 스쳐 지나가지만 붙잡아두고 싶은 행복한 순간 들이다. 마치 자고 있는 주인공도 웃으며 꿈을 꾸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꿈은 이어지지 않는다. 


쓱싹쓱싹. 쓱싹쓱싹.

알람과도 같은 동네 누군가의 빗자루 소리에 주인공은 깨어난다. 마치 그 빗자루 소리가 어제의 꿈같은 순간들을 지워버린 것처럼. 그리고 다시 새로이 반복되는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어제의 일은 다 없었던 것처럼. 이불을 개고 양치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입고 동전을 챙긴 다음 문을 나선다. 시원한 새벽 공기 아래 하늘을 보며 그날 첫 행복한 미소를 보인다. 마치 처음 보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 우리는 어떠한가? 그 순간을 최대한 붙잡아두려 하고, 최대한 기록해두려 한다. 사실 그 순간은 지금 뿐인데도.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사진도 찍고 더 생생하게 남기려 동영상도 찍는다. 그런다고 그 시간이 붙잡아지지는 않는다. 물론 시간이 흐른 뒤 그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그 시절과 감정을 잠시마나 되새길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것들이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슬픔, 힘든 기억 그리고 나쁜 생각들을 빨리 잊어버리라는 말은 많이들 한다. 맞다. 일상 속 스트레스,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 인간의 유한함에서 오는 고뇌, 심지어는 닥치지 않았지만 언제든 있을법한 상황에 대한 걱정들까지. 이런 것들을 잊지 못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하루는 없다. 더 빨리 잊을수록 내가 지금을 살아갈 시간이 늘어난다. 인간은 그 필요에 의해 망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안 좋은 생각들을 빨리 잊고 매일매일을 소중히 살라는 이야기는 많이들 하지만, 너의 행복한 순간도 빨리 잊으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런데 그 행복을 왜 잊어야 하는가. 잊기 싫다. 잃어버리고 싶지도 않다. 그 행복한 기억과 같은 순간을 더 만들고 싶다. 그와 비슷한 시간이 온다면 더 길게 그 시간을 늘리고 싶다. 이렇게 행복했던 기억에도 미련은 남는다. 그런데 어떻게 다 잊겠는가. 


주인공처럼 매 순간 행복함을 느낄 줄 아는 조카는 자전거를 타고 바다까지 가보자고 한다. 주인공은 영화 속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는데, 내 예상과는 다른 ‘다음에’라는 대답이 나왔다. 조카가 그게 언제냐고 묻자 주인공은 말한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갑자기 일정을 바꾸고 멀리까지 여행하는 것 또한 행복할 것이다. 나도 갑자기 마음에 튀어나온 소리를 따르는 것이 진정한 행복한 순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게 되는 경우,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으로 그전까지의 행복한 시간마저 부정되기도 하였다. 마치 더 큰 자극에 대한 기회를 빼앗긴 것처럼. 




“꼭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겠어요?”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내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때, 와이프가 말한다. 나란 사람은 갑자기 비가 오면 좋아하는 카페에 가고 싶고, 하늘이 갑자기 맑아지면 한강이 잘 보이는 곳에 가고 싶고, 해질 무렵 하늘색이 예쁘면 노을 보기 좋은 곳에 가고 싶어 한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와이프가 보기에는 마음대로 못해 내 입이 분명 삐죽 나왔다고 한다.    


어쩌면 나도 이전에 행복했던 기억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자극을 얻기 위해, 그 미련스러운 행복에 갑작스러움까지 더하려 하는 걸지도. 매일매일이 새롭다면, 행복을 느낄 것들이 충분하다.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대로 꼭 다 해야 행복한 것도 아니고, 마음이 가는 대로 못해서 불행한 게 아니다. 



출근까지 1주일 남았다. 메모 앱에는 가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것의 목록이 있다. 이제는 그 목록이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딸아이와 앉아서 먹는 아침, 와이프를 데려다주는 차 안, 가족과 함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슬리퍼를 끌며 걸어가는 골목길, 부모님과의 한 끼 식사와 같은 순간들이 목록이 아닌 내 하루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지워졌다가 그 다음날 새로이 채운다. 



앞으로도 지울 것이다. 

쓱쓱 싹싹. 

머릿속에 남기지 않을 것이다. 

더 가지고 싶었던 욕심도, 그 순간의 찬란한 행복도. 날 멈추게 하는 슬픈 기억도. 

다 지우고 매일 새로 채울 것이다. 



(입이 삐죽 나올 때마다 그걸 또 기억해 주고 들어주려 하는 와이프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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