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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간 Sep 25. 2024

우리 능력의 한계를 양심이 정한다면 좀 그렇잖아요.

짧은 생각의 기록

돈을 벌기 위해 어디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당연히 법적으로 하지 말라는 건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법 말고도 우리의 경제 활동을 가로막는 것이 사회 규범이다. 법적으로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도리적으로 하지 않아야 되는 그런 선이 있다. 문제는 사람마다 이 선의 위치가 조금씩, 심지어 몇에게는 크게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찾아 하라고 경영학에서 가르친다. 요즘 세상에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틈새를 찾아 비집고 들어갈 틈이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각자 다른 도리적인 기준이 기가 막힌 틈새를 만들어낸다. 내가 상대적으로 도덕적 규범에 잣대가 허술하다면 그 틈새에서 할 수 있는 것과 돈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반대 입장은 또 다르다. 장사라는 일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친구가 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이 친구가 누군가 사람을 상대하고 물건을 파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순딩 순딩한 성격에 사기나 안 당하면 좋겠는데 그런 사람이 물건을 판다고 하고 있다. 당연히 이 사람의 사회적 규범 기준은 높다.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이 더 많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친구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많이. 그리고 그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세상에서 더 돈을 많이 벌 수밖에 없다. 법과 사회적 규범의 통념 그 사이, 그 각자 다른 그 땅이 크면 클수록 먹을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착하게 살라고 누가 가르쳤는가. 학교에서 그리고 집에서 너무도 뻔하게 착하고 선하게 베풀며 살라고 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도 모두에게 윤리적으로 피해 가지 않는 선에서 너의 이익을 좇으라 했다. 그럼 그 땅덩어리를 크게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 “나 누구에게 피해 안 줬는데?”라고.


그런데 사회적 규범의 잣대가 더 높아서, 즉 다른 경쟁자들보다 선해서 그 결과로 이익이 적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받은 피해일까? 아니면 내가 장사를 못한 것일까? 현대 사회에서 동떨어진 걸까? 이렇게 말하기 싫지만 바보인 것인가?


얼마 전 큰 온라인 쇼핑몰에서 자사 제품을 위해 리뷰 작업을 한 것이 의심되어 이슈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안다. 그 많은 리뷰들 모두 진실만은 아님을. 진실이 아닌 거짓 정보들이 올라와있어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다. 법적으로 문제 있다고 정한 선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쉽게 대답은 할 수 있다. 판매자가 좋은 리뷰만 남도록 관리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나쁘다고. 그럼 나쁜 일로 돈을 더 벌었다. 그런데 다수가 나쁘고 제제하기 어려워 사람들도 용인한다. 그리고 다수가 나빠서 대부분은 피해를 안 본다. 안따르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이런 지경까지 왔으면 사회 전체적인 잣대가 변한 것일까?


너무 멀리까지 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착하게 살아라.’, ‘남을 속이지 말아라.’, ‘청렴결백해라’라는 가르침들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기 쉽게 하기 위한 가르침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다른 경쟁 업체 대비 도덕적 기준이 높아 피해를 보고 있는 친구에게 감정이입을 좀 깊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피해’라고 말한 것 자체도 감정이입인 듯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가진 사회적 통념과 가치, 어떻게 보면 나를 더 존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들이 나란 사람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특히나 그게 돈과 관련된 비즈니스라면 더욱더.


더러워야 돈을 많이 번다고 한다. 싫지만 틀리다고 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에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더러워지든가 아니면 돈을 적게 벌든가 말이다. 내 존엄성을 생각하고 적당히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 세상이 너무 돈돈 한다. 착하게 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남 속이지 말라하지 않았는가. 그럼 돈돈하지라도 말지.




5년 넘게 간신히 사업을 버텨온 그 친구는 고민을 시작했다. 모두가 들어가서 이제는 진흙탕이라고 불리지도 않는 곳에 본인도 발을 담가야 하는지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같이 그 장단에 맞춰 뒹굴어야 하는가. 막상 들어가면 진흙탕이란 느낌도 안 날 수 있다. 모두가 진흙을 묻히는 게 최신 트렌드일 수도 있다. 친구는 발을 살짝 담갔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빚은 갚고 생활은 하며 살아는 가야 하니까.


아직 막 시작이라 돈이 많이 벌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업의 잠재력에 한계가 상승한 것은 맞아 보인다. 그리고 발을 담가보니 더 치사한 사람도 더 간악한 사람도 많아 보인다 했다. 혼자 뒹구는 것도 아니고 진흙을 온 사방에 뿌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사업이 아닌 다른 분야도 비슷할 것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속이고 딱 커트라인만큼만 일한다든지, 내 기준을 스스로 낮추어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더 던진다든지 등 내 시간 대비 효율을 끌어낼 방법들은 많이 있다. 그래도 남에게 일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을 제외하고는 내 양심의 선에서 어느 정도 살 수는 있다.


만약 친구처럼 내 돈과 직접적으로 연결 됐다면, 그래도 양심을 이만큼이나 지킬 수 있었을까? 나도 아마 내 양심으로 제한한 내 한계를 좀 더 높이려 하지 않았을까?


너무 멀리까지 생각이 이어져 존엄성이란 게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그 존엄성도 어찌 보면 입에 풀칠할 수 있어서 가능한 걸 지도.




긴 시간 아픈 몸을 회복한다며 벌이 없이 보냈다. 그동안에도 존엄성을 지키게 해 준 와이프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 옆에서 본 당신은 참 대쪽같이 도 양심 안 팔고 그릇을 키워 한계도 늘리며 일하고 있다고도.


항상 응원합니다. 그렇다고 고생하란 얘긴 아니니 오해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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