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반의 담임이 아닙니다. 우리반의 실질적 담임은 바로 황도윤입니다. 우리반 어린이들은 절대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아니됩니다. 사실은 자기네 담임선생님이 지독한 전략가였다는 걸 알아버리면 저에게 오만정이 떨어지고, 우리끼리 공들여 쌓아놓은 아름다운 신뢰의 탑이 젠가처럼 와장창 무너지게 될거에요. 그러니 같은 어른으로서 비밀 엄수를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라고 카리스마 없는 교사로 태어나고 싶었겠어요.
모든 사람이 카리스마를 장착할 필요는 없지요. 그치만 매일 악명 높은 에너지로 적군의 혼을 쏙 빼놓고 인해전술까지 구사해 적진을 무자비하게 밀어버리는 어린이들과의 전투에서 하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카리스마 없이 맨몸 출전한 교사의 운명은 다들 예상하셨듯 볼 것도 없이 백전 백패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사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어흥! 하고 울면서 태어난 것처럼 사자후를 질러 복도 이끝부터 저끝까지 아이들을 발발 떨게하고 호랑이 눈빛 한방으로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는 6학년들을 그냥 깨갱! 하고 제압해버린단 말이죠. 저는 늘 그런 분들을 선망하고 동경해왔습니다.
하지만 엄마에게 물어보니 전 분명 응애 하고 태어났으며, 게다가 호랑이띠도 아닙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는 커녕 고양이 솜방망이 수준의 타격감밖에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도 일주일에 정해진 양의 카리스마를 다 쓰고 나면 다시 발톱이 자라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는 매우 고심해서 적재적소에 냥펀치를 사용해 근근이 생존해야만 하는 운명이랍니다. 실로 고달픈 교사 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리스마 한올 없는 허술한 선생님이 택한 전략은 바로..
허술한 고양이 전략입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인품이 훌륭하고 믿을만한 집사를 심혈을 기울여 간택한 다음, 그친구를 본보기 삼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겁니다. 올해는 도윤이로 시작되었죠. 우리는 합이 꽤 잘 맞았습니다.
애들을 다른 교실로 잘못 안내해도,
“괜찮아요 선생님. 그러실 수 있죠. 올해 우리 학교 처음 오셨잖아요.”
“도윤아, 너 정말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구나! 샘이 실수했는데 이해해줘서 고맙다. 담부터 안 헷갈릴게.”
“지완이가 5번 문제 막혔다는데, 선생님은 어디가 이해가 안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돼. 지완이를 도와줄 사람?”
“제가 도와줄게요.”
“와! 누가 우유를 먹다 말고 냈어! 이거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도윤인 어떻게 생각해?”
“선생님, 일부러 그럴 애는 우리반에 없을 거에요. 실수로 그랬을 수 있으니 한번 더 기회를 줘보는 건 어떠세요?”
“선생님 학교 가기 싫다. 어떡하지?”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살순 없어요 선생님. 저희가 속 안 썩일게요.”
처음에는 어린이들도 어리둥절해하다, 차츰 허술한 고양이를 대하는 집사 도윤이의 온기가 차츰 친구에게로 퍼져갑니다. 벚꽃이 필 무렵이 되면 놀랍게도 도윤이가 두명으로, 세명으로 한잎 두잎 꽃잎처럼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내가 도와줄게.”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이런 말이 교실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냥생활, 아니 교사 생활은 천상계로 흘러가는 겁니다. 저는 그저 발톱을 드러낼 때와 숨길 때를 잘 구분해 가끔 우리반의 가치가 위협받을 때 지금껏 갈고닦은 발톱을 짠! 하고 드러내 주인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줄 뿐, 나머지 시간에는 그저 집사를 믿고 같이 놀고, 같이 웃고, 기다려주고, 가끔씩 전략적 허당 연기로 집사의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행동하면 그뿐입니다.
전 어린이들이 스스로 판단하며 성장하는 존재라고 굳게 믿어요. 기다려주면 어린이는 저절로 멋진 꽃나무로 자라납니다. 자꾸 성급하게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면 될성부른 떡잎도, 예쁜 꽃잎마저 떨어져버린답니다. 어설프게 겉만 익힌 열매는 건강하지 못하단거 아시잖아요.
자기들끼리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을빛 아래 다글다글 함께 영글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허술한 고양이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이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