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ENTJ가 디저트 가게를 차리면?

방송 작가에서 디저트 가게 사장으로 4

by 아임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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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떡하니 MBTI를 적어놓았지만. 솔직히 나는 MBTI에 대해 잘 모른다. 한창 유행일 때 궁금해서 검사해 보니 ENTJ가 나왔고, MBTI를 잘 아는 친구가 '역시 그럴 줄!'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대충 외향적인 성격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공감보단 사실이 중요하며, 계획에 미친 사람. 이라는 건데... 다른 건 잘 몰라도 "계획에 미친 사람'이라는 건 100% 동감한다.


나에게는 나름대로의 인생 플랜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려온 보물 지도 같은 거랄까? 청소년기, 중·장년기, 노년기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고, 세부적으로 연도별로 이루어야 할 목표, 월별로 해야 할 일들, 주간 계획, 그리고 하루 24시간을 쪼갠 계획이 있다. 계획에 실패했을 때 만회할 수 있는 플랜B까지도.


이런 성격은 방송 작가 시절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방송 기획부터 촬영, 그리고 방송까지 수많은 스케줄을 정리하는 건 계획광인 나에게는 스트레스보다는 즐거움에 가까운 일이었다. 또 방송 아이템이 엎질러져도 대비할 수 있는 아이템을 미리 준비해 놓는 것, 출연자가 펑크내도 대처할 수 있는 출연자 리스트를 확보해 놓는 것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가진 성향이었기 때문에 나의 이 성격이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업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사실 이런 성향을 가진 나 같은 인간은 사업을 하면 안 된다. 사업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뿐더러, 애써 마련해둔 플랜B 또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들이 많으니까. 그러나 나는 여우에 홀린 나그네처럼, 빵에 홀려 디저트 카페를 차렸다.


처음부터 오프라인 매장을 차렸던 건 아니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최대한 안전하게, 최소한의 자금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프라인 매장은 생각보다 초기 자금이 많이 필요하고, 성공 가능성은 희미하고, 망했을 경우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더불어서 방송 작가라는 매력적인 직업 또한 당장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유 주방'에서 창업을 하는 것이었다. 공유 주방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방을 공유하여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인데, 이곳에서 만든 생산품은 판매가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공유 주방은 촬영을 위한 주방형 스튜디오나 취미 모임을 위한 대여 공간이 아니며, 식품 조리와 유통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시설을 말한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주방을 공유한다는 것에 조금 거부감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방문해 보고 미팅을 해본 결과 매우 깨끗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또, 다 함께 같은 작업대에서 조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기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곳에서 생산하는 작업자들 또한 자신의 사업을 위해 조리하고 있기에 다들 조리 도구와 공간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 외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비교적 적은 자금으로 창업이 가능하다는 것.

-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하려면 기본적으로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당장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임대료, 월세, 공과금, 인테리어 비용, 각종 머신과 도구들 구매... 통장이 찢겨나가는 기분! (실제로 오프라인 매장을 차리고 보니 생각 이상으로 자금이 많이 필요했다)

- 공유 주방은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 시작이 가능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주방을 대여하는 비용과 개인 도구 및 재료를 구입하는 것까지 모두 합쳐 3백만 원~4백만 원 정도 들었다.


2. 일반 고객과의 거래(B2C)는 물론 카페 디저트 납품(B2B)이 가능하기 때문에 거래의 폭이 넓고, 그만큼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 카페 디저트 납품은 해썹 인증을 받은 공장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건 엄청난 이득이었다. 다만 내가 공유 주방에 있을 무렵에도 관련 법률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은 공유 주방에서 디저트 납품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비교적 적은 금액으로, 리스크 적게 시작할 수 있는 디저트 사업이라니! 나 같은 쫄보 모험가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게다가 공유 주방은 내가 필요한 시간만큼만 공간을 대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방송 작가 일을 하면서 운영해 나가기 딱 좋았다. 어느 정도 고객을 확보할 때까지는 방송 작가 일을 하면서, 짬짬이 공유 주방에서 작업을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방송작가이자 디저트 가게 사장이 되었다. 아임버터의 캐릭터를 만들고, 스티커와 각종 패키징이 완성됐던 날, 어찌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건 마치 막내작가 시절, 내가 처음으로 참여했던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올라갔던 느낌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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