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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대문 농린이 Jun 05. 2023

민둥상추와 연보랏빛 가지꽃

태어나서 처음 농사짓는 주말 농린이의 텃밭 일기 DAY+56

2023년 6월 3일


무성히 자란 상추들이 못내 마음에 걸려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목적은 두 가지, 혼자 상추를 다 수확할 자신이 없었고, 상추를 가져가줄 사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함께 있을 때 가장 편한 친구가 있지 않은가, 그런 친구다. 2주 정도 전부터 내가 먼저 같이 밭에 가자고 했는데, 이제야 불렀다. 친구를 부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오늘,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그-사실 오늘 좀 바쁠 거 같아. 호박덩굴 지지대도 설치해줘야 하고, 상추도 수확해야 하고, 방울토마토 가지치기도 해줘야 하고, 고추랑 가지들 지지대도 세워줘야 해서-"

"... 노렸지?"


친구의 뼈 때리는 직격탄을 모르는 척 피해 본다.


 일단 호박넝쿨들이 자랄 수 있는 지지대를 설치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무슨 생각으로 밭 한가운데 호박을 심었나 모른다. 넝쿨들이 그새 자라서 옆 밭으로 넘어가는 건 물론, 옆에 심어둔 당근, 깻잎의 그 가녀린 풀줄기들까지 덩굴을 뻗쳐 휘어감 고있다. 무서운 생명력이다. 이대로 가다간 깻잎은 숨도 못 쉬고 죽고, 당근은 뿌리가 차기 전에 줄기가 끊어져 죽을 것 같다. 다행히 다이소에서 그럴듯한 원형 덩굴 지지대를 찾았고, 이제 너희는 이것만 보고 자라라는 심정으로 크게 두 개를 박은 뒤, 강제로 2층까지 다 묶어버렸다. 



 팔근육 충만한 친구에게 상추 수확을 부탁했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시작하다, 5분도 채 안되어 큰 바구니를 찾는다. 자세가 나보다 더 농부 같다. 대학생시절 잡초 뽑기 알바를 했다며 잡초 뽑기 경력자라더니, 잡초 뽑기가 농사와 연관이 얼마나 있나 싶지만 경력자는 다른가-라는 생각이 아주 잠시 스친다.

 무서운 상추의 증식도 친구의 팔근육은 감당해내지 못했다. 금세 큰 장바구니 하나를 채우고, 한참이 모자라 차에 쟁여두었던 두 번째 장바구니도 다 채웠다. 어디선가 아삭아삭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어린잎이 연하다며 친구는 어린잎은 본인 입으로 직행시키며 상추들을 떼어나간다. 그런데 다 끝나고 보니 상추들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아니, 이상하다기 보다- 뭐랄까, 많이 깨끗하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순간 죽순을 심었나 싶었다. 혼자 웃으니 친구가 왜 웃냐는 듯 쳐다본다. 상추가 너무 깨끗한 거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아랑곳 않고 나머지 아이들을 정리해 나간다. 아무래도 상추가 제대로 된 농사꾼을 만난 듯싶다. 적어도 2주 정도는 상추의 무서운 증식능력에 놀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추 모종들은 호박넝쿨과 방울토마토의 무서운 증식력에 묻혀 죽어가고 있길래, 이대로 두면 어떻게든 죽겠다 싶어 꽃까지 핀 모종들을 파내어다 죽어버린 땅콩과 옥수수의 빈자리에 옮겨 심었다. 꽃까지 열린 마당에 옮겨심으면 정착을 잘 못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햇빛이라도 가득 받다 죽는 게 낫지 않나 싶은 마음에, 모조리 캐어다 옮겨 심고 지지대를 세웠다. 와중에 기특하게도 꽤나 실한 고추가 딱 하나 열렸다. 얘는 오늘 저녁, 재첩국에다 송송 썰어 넣어야겠다.



 가지에도 벌써 꽃이 피었다. 진작에 지지대를 세우고 널찍하게 키워줬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농사꾼을 만나 옹기종기 모여 지지대하나 없이 고생만 한 우리 가지들. 부족한 주인과는 다르게, 그 상황에서도 혼자 쪼그마한 키로 넓은 잎을 피우더니, 그새 꽃이 맺혔다. 연보랏빛 꽃잎이 예쁘다. 가지들에게도 뒤늦게 지지대를 세워줬다. 다음 주면 꽃이 만개하려나-기대된다.




 도와준 게 고마워 밥이라도 사려고 밭 바로 앞에 위치한 손두부 전문가게로 왔다. 두부버섯전골과 사이다 한 병을 시켰다. 초록빛 병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나오는 칠성 사이다가 왠지 정겹다. 안 먹을 반찬은 미리 빼자는 친구의 제안에, 이모님께 말씀드리고 절반 정도의 반찬을 받지 않았다. 이모님이 예쁜 생각을 한다며, 더 먹고 싶은 반찬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예뻐해 주셨다. 땀을 식히고, 매운 전골을 달달한 사이다로 누르며 늦은 점심을 해치웠다.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친구가 계산까지 해버린다. 어쩌다 보니 밥까지 얻어먹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언니다. 


"다음에 옥수수 열리면 그때 또 부를게!"


힐끗 째려보는 친구의 눈빛이 사랑스럽다. 기분이 좋다. 함께라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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