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남세아 Sep 12. 2021

일상의 위인들

두 딸 덕분에 바로 보는 세상



"아빠, 오늘 나 책 2권 읽었어"

"우와~~ 대단해. 너무 잘했다. 무슨 책 읽었어?"


 퇴근하고 옷을 갈아있는 데, 초등학교 2학년 큰 딸이 평소 너무나 듣고 싶던 말을 했다. 보통은 "아빠, 오늘 나 뭐 만들었어." 하면서 미술학원이나 학교에서 만든 물건을 자랑하거나, "아빠, 오늘 나 화나는 일이 있었어."라며 하루간 속상했던 일로 대화가 시작되는데, 오늘은 독서를 했다는 소리에 반가움과 새로운 책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다.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두 권의 책을 가져온 다음 거들먹거리며 침대 위에 살짝 던진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이게 정말 나일까'와 새싹 인물전 '나이팅게일'이다. 대화를 이어갔다.



"누가 골랐어? 나이팅게일이 누구인지 알아?"

"내가 골랐지. 나 나이팅게일 선서도 알아"


 큰 딸 특유의 허세로 가볍게 던진 말에 감사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얼마 전 동생과 소꿉놀이 할 때 간호사를 하대하는 모습이 거슬려서 구박했던 기억이 스친다. 평소 주변을 잘 헤아리는 아이라서 미안한 마음에 선택했을 수도 있고, 자부심이 넘치는 아이라 엄마에 대한 자랑을 하고 싶어서 선택했을 수도 있지만, 딸의 착한 마음이 내게 온전하게 전해졌다. 며칠 전 간호사와 관련된 대화를 글쓰기 소재로만 생각했던 나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들었다. 솔직히 나이팅게일 선서의 존재만 알았지 언제, 누가 하는지도 정확히 몰랐으며, 당연히 내용조차 읽어본 적이 없다. 딸과 일상을 나누고 방에 혼자 앉아 있는데, 공허함이 들었다. 딸의 다른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우선 나이팅게일 선서를 찾아보고 위인전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환되었다.



- 나이팅게일 선서 -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간호학도들이 2년간 기초간호학 수업을 마치고 임상실습을 나가기 전에 손에 촛불을 든 채 가운을 착용하고 간호사로서 윤리와 간호 원칙을 담은 내용을 맹세하는 선서이다. 최근 나이팅게일에 대해서 다른 평가도 하고, 검은 천사라며 메리 시콜을 더 추앙해야 한다고 하지만, 둘 다 헌신한 위인이 맞기에 누가 더 위인인가를 재단하기보다는 그들의 일생과 업적을 들여다 보고 감사하고, 배워야 할 것을 찾는 게 중요하다.


 어렸을 때 많이 접한 위인전은 어른이 되면서 조금씩 멀어졌다. 가끔 유명인의 에세이로 갈증을 달래기는 하지만, 대부분 여행 이야기나 삶의 소소한 것들을 통해서 감동을 전달받기만 했다. 취향을 만족시켜주고, 소중한 감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름 만족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가벼운 글 속에서도 배움을 조금씩 찾고 있기 때문에 대체 가능하다. 다만, 불혹이 지나면서 생각이 굳어지다 보니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평가하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위인전을 온전하게 볼 수 없다는 시답지 않은 비판적 사고가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게 문제이다. 결국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데, 다른 사람의 삶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목적이라면 멀리 있는 훌륭한 위인의 일상과 업적도 좋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의 업적과 일상에서 소중한 것을 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 전환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내가 좋아하는 선배로, 안중근 장군은 나와 함께하는 동료로, 나이팅게일은 아내로 바꿔서 그들의 장점을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훌륭한 위인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선배와 동료는 그분들의 업적에 비교할 수도 없지만,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일상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 경험이 있다.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에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후배의 편의를 생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후일 내가 해야 할 모습이 그려졌고, 매일 같은 시간에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늘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을 통해서 성실함과 자기 계발의 중요성을 배우며, 천 가지 일을 거침없이 끝내면서도 아이들 교육에 신경 쓰는 모습에서 내가 더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놀아줘야겠다는 다짐과 반성을 했다. 그렇게 '일상의 위인'에게서 배우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 일상의 위인은 허세로운 큰 딸이었다.


덧+) 둘째가 자신도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하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언젠가 둘째도 내 위인전에 들어갈 날이 오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말 부부가 아이들과 헤어지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