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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Oct 04. 2021

평생을 글 밭에서 놀다 가고 싶다

글 세상 떠나기

 새벽에 눈을 뜨 책상 앞에 앉아 창문을 열어 창 밖을 본다.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팔을 스치 어내린 비를 머금고 코 끝을 만진다. 곧 해가 뜰 텐데, 이곳이 너무 밝다 보니 창밖캄캄한 밤하늘처럼 어둑하다. 건너편 회색 하늘은 서너 개 큰 불빛남았고, 멀리 보이는 빨간 십자가는 몇 개 남은 간판 불빛과 함께 밤을 지새웠나 보다. 발아래 가로등 작은 불빛은 비출 대상을 찾지 못한 채 차갑게 서있다. 시월이 되면서 밤은 어지고 아침을 천천히 부른다. 어둑한 이른 아침부터 사는 의미를 더하기 위해 누군가 먼저 남긴 글 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는다.

 



 먼저 메이슨 커리의 '리추얼' 한 단락을 읽는다. 오늘은 카를 융이다. 들어 본 것 같은데, 여전히 누군지 전혀 르겠다.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바보다'라는 말이 쓰여있다. 분명, 쉬고 싶을 때 남긴 말이다. 요즘 주변에 한 곳만 바라보며 주변을 헤아리지 않고 정신없이 달리는 사람 많은데,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네주고 싶다. '넌 바보야'. 카를  책을 언제 읽어 볼지 모르겠지만,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라는 제목만으로도 귀가 솔깃한다. 귓속말 리가 많을 듯하다. 나머지 두세 장에 흐트러져 적힌 다른 글씨는 그냥 종이와 활자로만 보인다. 제목만 정확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사실, 어제 읽었던 부분은 제목과 사람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뒤로 넘겨보니 내용이 무척 새롭다. 어제는 읽지 않고 넘긴 줄 알았다. 천천히 읽어보니 기억나는 문구가 몇 개 있다. 신이 망각을 선물한 것 감사하다고 누가 말하던데, 어느 정도 선물해야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으면 한숨만 는다. 다만, 현실 같지만 망각으로 인해서 여러 번 새롭게 알고 감동받는 경험은 축복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다만, 누가 알까 봐 부끄럽긴 하다.


 가방에 항상 넣고 다니는 박연준 작가 '쓰는 기분'의 연필이라는 단락을 읽었다. 작가는 연필을 예찬하는데, 몽당연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지기까지, 이 연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종이 위에서 걷고 달렸을까.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종이 위를 긁적이던 숱한 밤, 그리고 낮이 필요했으리라. 그 시간을 충분히 보낸 연필들만 '몽당'이란 누군가의 품이 들고, 시간이 깃든 후에 붙여지는 말이다.'


 작가 글솜씨에 빠져 헤매는데, 갑자기 아내가 연필 가게를 가자고 한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요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아니면 누군가 글 밭으로 끌고 가기 위한 묘책일 수 도 있다. 책을 읽고 생각하 현실이 된다. 상상력이 뛰어난 월터가 부러워할 법한 일상이 이어진다. 한달음 걸어간 상점은 문을 닫았다. 상상이 깨지순간을 현타라고 들었다.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인연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고 삼층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오데, 작은 현관문 앞에서 여성 두 명과 엇갈린다. 문 닫았다고 알려줄까 잠시 고민하지만, 그녀들 운동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오지랖은 잠시 주머니에 넣는다. 두 번 정도 좌우를 왔다 갔다 하길래 길을 먼저 양보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간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돌아가는 데, 연필 가게 간판을 들고 나온다. 끊어진 연이 다시 이어지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가게 문 여나요?"라며 아내가 물어본다. 여성 중 한 분이 듣씹을 선사 하신다. 동방예의지국을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 생각하는 순간 자세히 보니 통화 중이다. 이럴 때 법정스님 말씀 '오해는 이해의 이전 단계이다'가 생각다. 이제는 계단을 다시 뚜벅뚜벅 올라가며, 인연의 끈을 잇는다. 벽에는 몽당연필도 그려 있고, 지우개도 보인다. 손님이 뒤에서 걸어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몰랐을 때 시했던 친절 직원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준다. 어색하지만, 처음 본 것처럼 가볍게 응대하며 보물창고 같은 연필 가게를 들어선다.



 요즘 박연준 시인이 내 일상 자주 방문하는데, 빠르게 완독하고 책장에 모셔놔야겠다. 적당히 다가와야지 깊게 몰입되면 작가 따라 하나 사생팬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찌감치 거리두기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독립 책방 '너의 작업실'을 멀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에 빠지면 덕후라는 표현으로 머물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아마도 십 년 넘게 마니아 성향이 강한 아내와 함께 살면서 내게도 스며든 것 같다. 아무튼, 연필 가게 Black heart(흑심)는 20평 남짓한 교실과 닮은 작은 공간인데, 연필이 많다. 연필과 연관된 지우개 연필 깎기도 있고, 각종 보조장비 메모지도 있지만, 온통 연필 보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연필이 여있다.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작가가 알면 엄청 좋아할 만하다. 나만 이제 알았을 수도 있다. 하나같이 잘 깎여 있는 성실한 샘플 연필과 연필마다 정보와 사연까지 꼼꼼하게 적혀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한 시간을 놀았다. 첫 손님이 진을 치는 중에 다음 손님도 올 법 한데 우리 방어 양상이 강력했는지 적들이 다가오진 않았다. 평일 점심시간 유동인구가 은 오래된 3층 건물에 우연히 찾아오기는 만무했다. 덕분에 편하게 놀다가 전유물을 실 획득하고 우리 자산 흔적만 가게새겼다. 하지만, 돈이 아깝지 않았다.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백 원주고 던 연필 한 자루에 소소한 의미가 더해지니 사십 배로 올라간다. 아깝지 않았다. 전혀 아깝지 않다. 충분하게 좋은 기분을 만끽했고, 소중한 글이 나 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아깝지 않다. 단지, 시처럼 려고 반복하는 거다. 정말 아깝지 않다. 쓸 때마다 '이게 얼마 짜리인데'라는 글자가 내 뒤통수에 새겨질 것 같 그걸 잊기 위해서 연필에 글자를 새겼다. 9자를 새기기 위해서 국민학교 때였으면 연필 3타스를 살 돈을 또 지불했다. 깝지 않다. 곰곰이 생각하니까 너무 아깝다. 돈이 아니고 좋은 문구가 생각났는데, 다음에 가면 새겨야겠다. 문구는 '아깝지 않다'이다. 하지만, 한글은 새길 수 없어서 평소 좋아하는 이니셜 'HJSY1023 하트'를 연필 끄트머리에 각인하고 나니까 희소하고 제법 근사하다. 반드시 칠천 원어치 글은 쓰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는다. 비슷한 연장을 여러 개 더 담고 직원에게 건네주니 제품 사연을 기계적으로 설명해 주며, 봉투를 봉해서 넘겨다. 연이 끊어질 때가 되니까 오늘 첫인상이 떠오른다. 애써 웃으며 법정스님을 한번 더 생각하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서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결혼기념일이 새겨진 작품을 가게 배경으로 뷰파인더에 담는다. 여행지에서 배경과 피사체가 비슷하게 나오는 느낌이 좋다. 둘 중 하나는 포커스가 잡히지 않더라도 근사한 이 든다. 그렇게 값비싼 추억을 쌓고, 연필 가게를 나왔다



 아내와 나는 연필 가게에서 십여분 떨어져 있는 책방으로 산책하 듯 손을 잡고 걸어다. 양말가게도 지나고 건물마다 두 개씩 있는 커피숍도 지나친다. 목적지에 다다랐는데, 책방 입구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연필 가게에 들어갈 때 느낌과 비슷하다. 아내가 성큼성큼 가게로 다가가더니 밖에 나와있는 출입자 연명부를 작성한다. 복도 끝 마지막 집 문을 여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얼마 전 접한 '죽은 자의  집 청소'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음습한 기운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철컹'하며 문이 안 열린다. 분명, 오늘은 영업일이 맞는데,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오만가지 걱정을 한다. 생전 와본 적도 없고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독립 책방 치안과 사장님 건강을 염려한다. 이 정도면 병이다.  다행히 문 옆에 사장님 전화번호가 보인다. 역시, 행운의 남신에게 행복한 추억으로 연결되는 끈은 끊어질 수 없다는 안도감과 나에게도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다는 진부한 징크스가 다가올 것 같은 양가감정으로 번호를 꾸역꾸역 눌러본다.


 전화연결이 되는데, 갑자기 '너의 작업실' 장님 탱님이 등장한다.

"오늘 제가 일을 못 나가서요. 비밀 번호 000000이니까 문 열고 오른쪽에 있는 테이프 붙여진 스위치만 켜시면 환할 거예요. 잘 놀다가 문단속하고 가세요"


 내가 좋아하는 글 밭은 이렇다. 손님이 오든 말든 가게를 두고 산책을 가는 사장이나 일이 생겨서 쉰다고 보이스 피싱에 적합한 마흔 살 남성 목소리만 듣고 가게를 기는 사람이나 믿음과 신뢰가 변에 깔려있다. 아니면, 사람들은 분명 나를 글 밭으로 들이는 사이비 종교 전도사이거나 다단계 홍보원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매력적일 수 없다. 거리두기를 하려는 내 본심을 눈치챘는지, 자꾸 낚시 바늘에 좋아하는 오도로우 니스시를 걸어서 날 유혹한다. 정신줄 놓치면 안 된다고 계속 다짐한다. 그나마 수십 년간 이성으로 단련된 머리가 가슴속 과 열심히 싸우면서 버텼다. 십 년 후 은퇴하기 전까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계속지 예상과 전망을 넘어 예언할 만큼 확신이 선다. 하지만 써부터 이성이 지쳐간다. 진심으로 독립 책방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서 멈추려 한다. 한 번은 탱님한테 너의 작업실 23호점을 내겠다고 농담 삼아 얘기했는데, 아내가 좋아하는 빵과 커피가 가득한 독립 책방 개업우리 삶 버킷리스트 3번으로 올려야겠다.



 아담한 독립 책방은 간판 마음에 든다. 내가 좋아하는 자음으로만 만들어유독 눈에 들어왔다. ㅇㄷㅂㅅ 자음 네 개로 잘 표현했다. 자음으로 가장 멋진 브랜딩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두 딸과 두 딸의 고모이다. ㅇㅅㅇ인데, 고양이 얼굴이라 어디서 사용하기 좋다. 특허 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가 생각한 모든 아이디어는 세상에 널렸다. 그 널린 사실을 내가 간접적으로 접하고 머릿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까지 내렸다. 아마도 마인부우처럼 흡수를 하는 종족이니 무의식적으로 따라 한다. 글도 어딘가에서 표절한 것 일 수도 있다. 나만 모른다

  

 여하간, 아내와 둘이서 책을 보면서 건축책이 많다는 게 느껴졌다. '혹시, 타다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고, 느낌만 왔다. 어차피 가게에는 물어볼 사람도 없다. 혹시 맞는다면, 가게 이름까지 지을 정도로 타다오를 좋아하는 사장한번 만나보고 싶다. 타다오 세계에 대해서 유현준 작가 글이 아닌 실제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 다음에 방문하면 반드시 물어볼 생각이다. 아내는 파주에 사는 스로우 부부가 출간한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을 골랐고, 나는 타다오 기운을 이어아서 하루키 가벼운 산문인지 소설일지 모를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집었다. 집에 책이 쌓여 있지만, 독립 책방을 방문하면 책을 안 살 수가 없다. 갈 때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구입하여 차고 넘치더라도, 진흙탕 싸움을 계속할 예정이다. 이래서 개업하고 싶은 건 아니다. 어차피 현업을 이어가면서 사업을 할 수 없다.

 

 사장님께 전하여 메모한 곳에 은행명이 나와있지 않다고 친절히 전해주고, 메모에 기업은행을 고 책방을 나왔다. 책방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가볍게 책을 읽고 아내와 소중한 비밀여행을 이어갔다.




 하루 종일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생각해 보면 예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세상은 같은데, 내 눈에 보이는 게 다 뿐이다. 수영을 좋아하면 버스나 운동장에서도 수영할 수 있다. 당구가 좋아지면 모든 천장은 당구대로 변한다. 이런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는 곳에서 글은 온 세상에 깔려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 온 세상이 글 밭이고 볼 수 있는 눈도 이미 장착되어 있었는데, 이제서야 눈을 떴다. 덕분에 천상병 님이 아름다운 세상 소풍 떠난다고 할 때, 지금껏 몰랐던 소풍을 늦게나마 알 수 있어 한없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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