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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Oct 09. 2021

칠천(七千), 숫자에서 오는 당당함

연필이 아깝지 않다. 아깝지 않다. 정말 아깝지 않다.

 한 자루에 칠천(七千) 원짜리 연필을 샀다. 새 연필을 만나 연필을 깎기 위해서 책상 앞에 앉는다. 연필 깎기와 연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신성한 연필 깎기를 진행한다. 그러고 보니 연필 깎기는 만원이다. 한 손에는 연필 깎기를 적당한 힘을 주어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엄지와 검지로 연필 앞부분을 잡아 연필 깎기 구멍에 집어넣는다. 연필 끝부분이 차가운 칼날에 닿는 느낌이 들면,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초침보다는 빠르게 계속 돌린다. 지조 있게 다 깎일 때까지 같은 방향으로 돌린다. 시간과 같이 돌아가는 연필은 자신을 덮은 포장이 얇은 막으로 베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차가운 칼날에 옷이 벗겨지면서 갈색 속살을 조금씩 드러난다. 연필은 겸손해진다. 속살에 희미하게 보이는 나이테 숫자만큼 돌다 보면 안쪽에서 검은 뼈가 나오기 시작한다. 뼈는 포장지나 속살처럼 얇은 막으로 깎이지 않는다. 차가운 칼날과 부딪치면 형태를 유지하지 않고 작은 조각으로 뼈를 부수며, 연필 깎기를 마무리하라고 알려준다.

   



 깔끔하게 깎인 연필은 꽤 날카롭지만 당당하다. 살과 뼈를 깎으면서 존재의 이유와 본질을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쓰거나 그릴 수 없다. 이제부터는 작가의 몫이다. 연필은 다소곳이 작가 손에 이끌려서 글과 그림을 창조한다. 없던 세상에 실재를 만든다.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뼈와 살을 깎고 모든 것을 품어 주는 종이 위에 검은 뼛조각을 갈아가며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흔적은 누군가의 가치관이 되고, 노래가 되어 날아가기도 하며 세상을 담는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시간을 가두며 역사가 된다. 날카로웠던 모습은 너그러운 종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뭉그러지면서 다시 겸손해진다. 세상을 창조하는 당당한 모습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뼈와 살을 깎는다. 마치 솔개가 부리를 바위에 내치면서 더 강한 부리를 만드는 환골탈태처럼 짧고 단단해진다. 그렇게 계속 몸을 연마하며 겸손함과 당당함을 유지한다.  연필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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