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인구 백만이 넘은 고양시는 아직까지도 행정구역 명칭을 고양이라고 말하면 일산이냐고 되묻는 경우가 많다. 고양시에 최근 2년째 살고 있다. 고작 2년 살면서 해당 지역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게 조심스럽지만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가 5번이나 다시 되돌아온 조금 특별한 이력이 있다. 고양은 대도시이면서도산과 호수, 강이 발달했고,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공원도 많이 형성되어 있다. 자연 발생 도시인 인천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예전부터 계획도시 고양은 반듯한 이미지였다. 고양은 정부와 지자체의 도시 계획에 따라 짧은 기간 동안 유동 인구와 사회, 문화, 경제의 중심이 국지적으로 변했다.
최근 20년 동안 스무 번 넘는 이사로 인한 고통과 자녀 학업문제로 인해서 정착할 장소를 물색 중이다. 후보군은 고양, 인천, 대전과 천안인데, 단연 고양이 앞선다. 다른 좋은 지역을 놓고 비교했지만, 결국 고양이 앞서는 이유는 끊어질 듯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중한 추억 때문이다.
처음 고양을 방문한 것은 초등학교 때이다. 어머니 손에 붙들려 결제대금을 떼어먹은 지인을 찾기 위해서 방문했다. 인천에서 버스를 2시간 이상 타고 덕양구 벽제동 한 채석장 같은 곳으로 왔다. 머릿속에 남은 건 산과 채석장, 그리고 버스에서 멀미했던 기억뿐이다. 지금은 외곽순환도로를 이용하면 차가 막히지 않을 경우 삼십 분이면 오고 간다. 그 후로 잊고 지내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점에 아버지 승합차를 몰래 가져온 친구와 함께 일산 호수공원과 정발산 주변 호화 주택단지를 놀러 왔다. 당시 친구들과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일산 신도시 같은 곳에서 살면서 호수공원을 달리고 주변에 맛집도 다니자고 약속했다. 정발산의 근사한 집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그들과 이웃으로 살고 싶었다. 스무 해가 넘게 지나니까 아득하다. 지금 그 친구들 중 한 명은 미국 천사들의 도시에서 살고, 다른 한 명은 전국 축제를 따라 유랑하며, 서울에서 샌드위치 사장을 하거나 고향인 인천에서 착실히 살고 있다. 오직 나만 계속해서 고양을 들락거렸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여러 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낯익은 풍경이 반갑기도 했지만, 빠른 변화로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가끔은 예전의 소중한 존재가 변해 있는 모습에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20대 중반 혈기 왕성한 나이에 고양을 다시 찾아왔을 때는 라페스타에는 사람이 넘치고 웨스턴 돔과 일산 MBC가 새롭게 지어져서 각종 방송매체에 홍보도 되고, 길거리에는 연예인도 많이 다녔다. 20대에 활기찬 기운에 접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도시와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느꼈다. 그렇게 4년을 보내고 이역만리 타지 레바논으로 떠났다. 시간이 흐른 뒤 귀국하여 서울과 대전 그리고 다시 양주를 거쳤다가 30대 중반이 되어 고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는 혼자가 아닌 가족이 되어 돌아왔다. 고양 역시 이전과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호수공원에서 가족 단위로 산책하는 사람은 여전했지만 유독 화목해 보였고 분수 공연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마트 타운이나 원마운트 같은 가족단위 여가시설들이 눈에 띄게 발전했다. 예전에는 북한산까지 가기 위해 행군으로 넘어 다니던 잔잔한 시골 느낌의 삼송마을 일대가 개발되면서 도시에 어울리는 삼송지구로 바뀌었고, 대형 쇼핑몰이 집중되었다. 그러면서 고양의 중심이었던 정발산 부근이 오히려 한산해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아쉬움도 남지만,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면서 가족 같은 고양에서 30대를 함께 보내고 다시 한번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다시 양주와 이천, 분당을 거쳐서 고양으로 돌아왔다. 마흔이 넘었고 조금은 어른이 되었다. 곧 2년이 되어 간다. 하지만, 코로나와 함께 살다 보니 예전처럼 다니지는 못하는데, 예전보다 크게 발전되어 생활여건이 편리해진 가까운 지구보다 오히려 조금 멀리 떨어진 호수공원과 밤가시마을을 많이 찾게 된다. 우연히 만난 독립 책방도 있지만, 젊고 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동네로 눈을 돌리고 있다. 마흔 해를 살다 보니까 취향이란 게 생겼다. 좋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가치관을 통해서 선별하고 크게 치우치지 않으며 즐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급격하게 발전하는 동네보다 차분하게 천천히 계속 그곳에 있을 것 같은 동네를 찾게 된다. 그 동네에서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어른이 되고 싶은 것 같다.
10대 때 새롭게 시작하는 신도시에서 미래에 대한 갈망을 품었고, 스무 살에는 활기차게 춤추는 라페스타와 함께 춤사위를 펼쳤으며, 서른이 되어서는 가족 모두와 같이 즐길 수 있는 아득한 곳과 함께 했다. 이제는 마흔이 되어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앞으로 지내야 할 날을 위해서 취향에 맞게 글과 맛이 공존하는 소중한 동네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낸다. 이런 모든 상황은 삶을 지나는 내 모습과 가치관이 고양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어치피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한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읽은 김완 작가의 '죽은 자의 집 청소'에 비슷한 문구가 생각난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라보듯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덧) 참고로 이 책은 읽기 힘들다.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어서 한 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계속 보게 된다. 그게 인간이라서. 사실, 독서모임에 평을 해야 해서.
덧+) 일산은 '하나의 산'이라는 뜻이다. 일산 중심지가 정발산역 인근이라 낮은 구릉의 정발산을 하나의 산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경의선 일산역이 있는 일산동 근처 고봉산이 하나의 산을 뜻한다. 고봉산도 그리 높지는 않다. 해발고도가 200m 정도로 가까운 북한산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된다. 하지만 주변에 산이 없다 보니 우뚝 솟은 고봉산이 돋보여서 예로부터 하나의 산이라는 뜻으로 일산이라 불렸다. 중앙에는 고봉산이 있고, 남쪽에는 덕양산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행주산성으로 더 유명하다. 고봉산과 덕양산의 글자를 합성해서 고양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고양처럼 두 개의 지역 또는 지물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백석리와 마두리가 합쳐진 백마역이 그러하다. 게다가 근처에 백마부대도 있다. 중대장 시절 일산과 관련한 지명의 유래를 연구하고 알렸던 탓에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