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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Nov 10. 2021

노천온천에서 마주하는 첫눈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온천 천국 일본에서도 가장 온천다운 온천을 가득 품고 있는 곳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천 개 이상 원탕에서 온천이 흘러나오고 각종 함유량을 자랑하며 색과 향 심지어는 맛까지 홍보하지만 홋카이도 앞에서 유명한 온천은 모두 고개를 숙인다.


 3대 온천이나 10대 온천을 선정하면 잘해야 한 두 곳 포함되지만, 홋카이도를 우선하다고 해서 문제 삼을 만한 사람이나 단체는 아무도 없다. 어차피 도긴개긴이다. 다 좋다. 온천을 다루기 위해서 아내와 다녀온 온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을 서로 이야기했는데, 같은 곳은 아니지만 둘 다 홋카이도에서 다녀온 온천을 선택했다.

 

 홋카이도는 대한민국의 2/3 크기나 되기 때문에 실제 차를 타고 다니면 지도에서 보는 것보다 엄청 넓게 느껴진다. 넓은 지역에 다양한 온천이 산재한다. 소설 빙점과 영화 러브레터 속 추억이 깃든 장소로 잘 알려졌고, 삿포로 맥주와 유제품이 유명한 홋카이도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십 년 전 겨울이 막 시작하던 때였다. 가까운 나라 일본인데, 비행시간 세 시간을 감수했다.




 처음 도착하는 곳은 홋카이도 중앙에 위치한 치토세 공항이다. 모든 여행 스케줄은 아내가 계획했기 때문에 아내 손만 잡고 끌려다녔다. 오타루 운하나 오르골 박물관, 시로이고히비토 과자공장을 다녀오고 파우더 스노우를 느끼기 위해서 가까운 테이네 스키장도 잠시 들렀다.



 삿포로 시내에서 수프 카레와 나마비루(생맥주)도 먹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전차를 타고 시내를 누비며 잘 읽지도 못하는 가타카나를 보면서 일본을 온전히 느꼈다. 평소 싫어서 멀리했던 일본을 눈으로 입으로 귀로도 접하면서 하나씩 내게 가져왔다.


 홋카이도 보다 먼저 다녀온 도쿄 여행은 쇼핑 위주였고, 도심지에 있는 상업화된 온천만 다녀왔기 때문에 두 번째 일본 여행은 평소 다녀오고 싶었던 온천을 하루 포함했다. 삿포로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노보리베츠에 대형 료칸을 예약했다.


 치토세 공항에 도착한 다음 료칸 전용 송영버스를 타고 바로 이동했다. 2층 버스 가장 앞쪽에 앉아서 망망대해인 북태평양을 옆에 두고 해안으로 길게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 달렸다. 늦은 오후라 금방 해가 졌다. 위도가 높고 12월이 되다 보니 오후 네시만 지나도 어둑해진다.


 해안도로를 따라 한 시간 이상 달리다 내륙 방향으로 접어들면서 좁은 2차선 도로가 나왔다. 산길을 굽이돌아 내륙 방향으로 십여 분 정도 더 이동했다. 무성한 숲과 좁은 길을 지그재그 올라가다 정상에 다다르더니 다시 가파르게 내려갔다.


 내리막길에 들어서자마자 버스 창문이 꽉 닫혀 있음에도 강한 유황냄새가 진동을 다. 버스에 함께 탄 각국 관광객들이 웅성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버스 앞 창문으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텔과 료칸 사이를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마을은 관광지답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토록 가보고 싶던 온천마을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버스가 호텔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유황냄새는 더욱 강력하게 콧속으로 들어왔다. 유황냄새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꽃 내음처럼 느껴졌다. 구수한 계란 익은 냄새를 맡으며 차 밖으로 나가는데, 항상 친절한 료칸 직원이 케리어를 옮겨주면서 안내했다. 로비로 이동한 우리는 체크인을 하고 바로 온천장으로 향했다. 저녁 6시가 되어서 허기졌지만 노곤한 몸을 녹여줄 온천이 절실했다. 우리가 온천을 방문한 시간이 온전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노보리베츠에서도 인기가 높은 세키스이테이 료칸은 온천이 세 개 있다. 그중 옥상에 설치된 공중 온천은 인기가 높아 많이 붐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간 시간에는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대부분 료칸에 포함된 석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첫 료칸 여행이라서 잘 몰랐기 때문에 가이세키-한정식과 비슷한 형태의 일본식 코스요리-를 별도로 신청하지 않고 차량 이동 간 도시락을 먹었다. 어차피 야식으로 편의점 쇼핑을 계획한 터라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덕분에 아무도 없는 온천에 혼자서 입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첫 경험을 토대로 매번 온천여행을 다닐 때마다 저녁시간을 조절하면서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짙은 남색 커튼 틈 사이로 미닫이 나무 문이 보인다. 손을 내밀어 옆으로 열자 드르륵 소리가 난다. 객실부터 신고 왔던 나막신은 텅 빈 신발장 한편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다다미로 되어 있는 탈의실로 들어선다. 볏짚을 엮어서 만든 바구니에 벗은 옷을 하나씩 차분하게 쌓는다. 평소 목욕탕이었으면 후다닥 벗어서 대충 던져놓는데, 여유로움 속에서 성스러운 온천에 다가가는 과정도 차분하게 진행한다.


 일본 영화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옆에 가지런히 놓인 얇은 수건 하나를 집어 든다. 물소리가 들리는 뿌연 유리로 가려진 미닫이 문쪽으로 다가선다. 한 손에는 얇은 수건을 들고 다른 손으로 미닫이 문을 열자마자 뿌연 안개가 쏟아져 나오면서 내 몸을 감싼다.


 눈앞에는 흐릿하게 몇 개의 큰 바가지 탕이 보이고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유황속에 갇혀 있다보니 더 이상 유황냄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별빛도 보이지 않는다. 온천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가볍게 몸을 씻고 큰 바가지탕으로 향한다.


 바가지탕에 가까워지자 히노끼 나무로 만든 용출구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물은 계속 넘친다. 말로만 듣던 카케나가시 방식-온천물을 흐르게 하여 수질과 온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식- 으로 설비되어있다.


 온도를 확인하고 한 명이 들어가면 넉넉할 크기의 대형 바가지 안에 몸을 담근다. 자연스럽게 탄식이 나오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희미한 음성이 들린다.


"여보"


 내 탄식을 들은 아내가 아무도 없음을 확신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부른다. 대나무 벽으로 가려진 바로 옆이 여탕이었다.


"어 여보, 나 여기 있어"


 나 역시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둘은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좋아하면서 아무도 없는 상황과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온천을 즐긴다. 마치 둘만의 전세탕이 된 것처럼 행복한 시간이 흐르고 다른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들어올까 봐 걱정하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때, 노란 조명 사이로 하얗고 가벼운 깃털 하나가 스친다. 온천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지나갔다.


"여보, 첫눈이야"


 대나무 벽 옆에서 아내가 첫눈 소식을 전해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12월 둘째 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맞이하지 못했던 첫눈을 조용한 노천온천에서 아내와 함께 마주한다. 어둑한 밤하늘 사이로 제법 내리는 눈은 따뜻한 온천 위로 한송이 한송이 떨어지고 물에 닿으면서 녹아 사라진다. 혼자 그리고 둘이서 첫 온천여행의 순간을 오감으로 즐긴다. 그렇게 아내가 뽑은 생애 최고의 온천은 우리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노보리베츠는 관광지라서 선물가게나 료칸이 즐비하다. 고급 료칸부터 대형 료칸까지 다양하게 있고, 지오쿠다니(지옥계곡)나 오유누마(천연족탕)같은 볼거리도 많다. 가까운 곳에 도야호가 있어서 호수주변에는 고급 호텔도 많다. 영화 해피해피 브레드 촬영지였던 카페 마니도 구경거리 중 하나다.


 아내는 처음 함께한 온천여행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실 나도 손꼽을 정도로 좋았던 곳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최고는 아니다. 날씨와 사람과 분위기가 정말 잘 어울렸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특히, 첫눈이 내릴 때쯤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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