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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Nov 06. 2021

오천(五千), 숫자에서 오는 안도감

 평소 하던 일과 터전이 바뀌고 삼일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첫날부터 정신없게 들이닥치는 역경을 저버릴 수 없을만큼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작은 심장은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마주하는 사람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함께 걸어야 할 상황이기 때문에 내색할 수 없는 불편함도 있었다.


 여러 번 다짐하고 시작하는 자리라서 우려가 큰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충분히 준비하고 등판하지도 않았다. 단지, 내공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책임을 다하여 존재 가치를 유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려 했지만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천천히 둘러보며 걷기로 했다.


 바쁜 일정이 속되면서 2년 가까이 꾸준히 달리다가 최근 열흘 동안 못했다. 사실 열흘 전에도 한 달 동안도 조금 느슨해졌다. 결국 바쁜 일정이라는 핑계를 얻어 타고 장기간 중단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루 이틀 바쁨이라는 보호막 아래서 나태해지고 불어 터지는 육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했다. 합리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직 이른 아침에 잘 일어나고, 글을 쓰며 사명감으로 일에 집중한다고 읊조렸다. 유치하다. 이기적이고 게으른 나를 합리화할 뿐이다.


 1년 넘게 달렸지만 아직까지 달리기 전에 수없이 고민한다. 오늘 날씨는 달리기 적절치 않은데, 배가 꾸룩꾸룩거리는데, 해야 할 일이 남았는데, 각종 핑계가 머릿속을 장악한다. 머리로는 달리지 않는 게 정답이다. 그래도 결연한 의지를 방패 삼아 영하 20도에도 뛰었고, 1년 넘게 쉬지않고 달렸다. 달리고 난 다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무거운 다리는 트랙으로 향한다.


 달리는 중에도 계속 고민한다. 오늘은 조금만 뛰자.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조금 있으면 하기식을 하기 때문에 흐름이 끊길 수도 있는데, 여전히 소소한 장애물이 뇌 속에 새롭게 설치된다. 하나는 뛰어넘고 다른 하나는 굴러서 헤쳐나가며 넘기 힘든 벽은 우회하여 장애물을 극복하면 어느새 목표치에 다다른다.


 1년간 1,000km 이상 달렸으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더 이상 기록도 유지하지도 않는다. 단지 하루 목표치만 정해놓고 힘껏 달리다 목표에 다다르면 성취감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쉬는 날도 아내와 함께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여 좋은 기운을 유지했다. 열흘 전까지만.




 일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오늘 집에 가는데, 19시에 나랑 달리기 할 수 있겠어?" 망설였다. 아직 해야 할 게 조금 남았고, 차분하게 책도 읽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에게서 전달된 활자는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춤으로 바뀌더니 빠른 리듬에 맞춰 격렬해진다. 동공을 통해서 뇌 속에 들어온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내 목을 살짝 조이더니 손가락으로 순간 이동한다. 강력한 힘에 제압된 나는 맥없이 순응하고 있다. "ㅇㅋ" 짧은 문자로 대답했지만 자음 두 개에는 복종한다는 결연한 자세가 새겨있다. h-hour는 결정되었기 때문에 모든 일은 그 시간에 맞춰야 한다. 완벽한 작전을 위해서 가변 요소를 하나둘 고정시키는 작업에 들어간다. 계획은 실행으로 옮겨지고 이제는 달릴 일만 남았다.


 자주 뛰는 호수공원에 아내보다 조금 늦은 20시에 도착했다. 어둑하고 쌀쌀해진 한적한 공원 진입로를 아내와 함께 걷는다. 이동 중에 안부를 묻고 스트레칭을 한다. 달리기 코스에 가까워지자 본격적으로 몸을 푼다. 늘이고 찢고 접고 펴며, 왔다 갔다 하면서 갑자기 뛰어도 죽지 않을 만큼 준비운동을 한다. 아내가 스마트워치 버튼을 누른다. 주인님께서 뛰자는 신호를 보낸 거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날이 싸늘해지고 어둑한 밤이라 그런지 가볍게 뛰는 사람들은 없어졌고 황영조와 손기정만 남았다. 평소 추월당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달리기 시작한 지 오분이 지나지 않아서 4명이나 우리를 추월해 갔다. 오랜만에 뛰는 거라 무리해서 따라갈 일도 없지만, 꾸준하게 달렸어도 따라잡기 버거울 만큼 실력자만 뛰고 있다. 점점 멀어진다. 천천히 차분하게 오늘 목표만 다하자는 생각으로 페이스를 유지한다. 등 뒤에서는 주인님이 잘 뛰라고 숨소리도 없이 가볍게 따라온다. 좌우로 흔들리는 내 그림자 바로 뒤에서 점점 커지는 그림자가 잡아먹을 듯 거대해진다.


 한참을 뛰었다. 아직 목표까지는 많이 남았는데, 합리화 작업이 다시 시작된다. "당신 먼저 가. 오래 쉬었더니 힘드네" "여보, 절반도 안남았어. 천천히 뛰자! 오늘 당신이 조금 빠르게 뛰던데. 이제 날 따라와" 합리화는 주인님 주문에 무너지고 개끌소끌로 뒤따라 뛰기 시작한다. 이제는 세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본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으로 뒤돌아 보는 건 알겠지만, 그 눈빛을 거부할 수 없도록 십 년간 학습된 내 육신은 한발두발 자연스럽게 따라뛴다.


 컨디션을 되찾자 매번 달리던 모습으로 변한다. 아내 왼쪽 반보 뒤에서 후방 보호막이 되어 내가 달리고 내 숨결을 느끼는 아내는 앞에서 리드한다. 아내가 왼손을 들어 검지를 편다. 1km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아내는 속도를 조금 올린다. 본게 너무 많다. 가벼운 오르막을 같은 속도로 뛰면서 호흡은 거칠어진다. 한번 더 사인을 보낸다. 눈을 감고 싶다. 하지만, 거의 끝났으니 힘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속도는 더 붙는다. 드디어 시작점을 지났다. 이제 이백보만 더 나아가면 목표에 닿는다. 어차피 주인님 시계가 종료를 알려야 끝나기 때문에 눈과 귀는 주인님 손에 집중하며 빨라지는 속도에 끌려간다. 분명, 옆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볼 것이다. 덩치 큰 남성이 자기 반만 한 사람에 뒤처져 헉헉거리며 끌려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다. 아니 사랑스럽다. 같이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한번 경험하면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는 상황이 되자 아내 손바닥이 멈춤을 뜻하는 사인으로 바뀐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숨 고르기를 하는데, 아내는 또 말을 한다. "잘했어. 우리 남편" 그러면서 내 등을 토닥인다. 분명 다른 사람은 신경도 안 쓸 텐데, 왠지 혀를 차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다. 그래도 뿌듯함은 양 어깨 위로 올라왔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천천히 돌아서 걷는다.




 며칠간 계속되었던 불안과 두려움은 사그라들었다. 성취감을 통해서 편안하고 차분한 자아가 만들어졌다. 오천미터를 달리면 마법처럼 모든  변한다. 게다가 달리는 중간중간 글감도 떠오른다. 운동을 통해서 얻는 감정이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오고 글의 중심이 되어간다. 잠시 머무르던 생각과 감정은 달리기가 격해질수록 함께 요동친다. 모든 것이 날아가기 전에 빠르게 손가락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게 매일 오천(五千)미터 달리기를 통해서 안도감을 선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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