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글자를 새기며 기록을 남긴 지 육 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지만, 가끔은 내 글에 공감하며 함께 웃어주는 사람도 있다.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아내와 두 딸에게 선물하기 위함이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글을 읽고 쓰면서 새로운 한 가지 이유가 내게 다가왔다.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활자에 기대어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을 엮으면 단락과 글이 만들어진다. 어차피 완성되어도 잡글이지만, 마침표를 찍는 순간 내 감정과 생각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감정과 생각을 벗어나고 싶은건 아니다. 단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조금씩 끌어내고 싶을 뿐이다.
나를 통과했던 슬픈 기억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다시 꺼내 정리하려고 한다. 감정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던 시절 그냥 버티면 되고 시간이 약이라는 몹쓸 어른들 말에 묻어 두었던 아픔은 시간과 바꾼 형체도 없는 것이다. 무뎌진 감정을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는 단순히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얼마 전 죽음에 대한 단상을 통해서 큰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사랑하는 주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아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멈췄고, 슬픔을 감내할 수 있는 자아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껏 숨거나 도망치거나 벗어나려고 했던 아픈 기억을 수용하는 연습을 하고 싶었다. 드디어 글 쓰기 목적에 치유가 포함된 것 같다.
기억 저편에 남았지만 감춰졌거나 스스로 감춘 기억이 얼마나 많을지 아직 잘 모른다. 잊힌 기억을 다시 되돌릴 수 있으며, 다른 누구에게는 아픔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속에 곱게 모셔두었다가 단초가 되는 장소와 물건, 사람을 통해서 불현듯 찾아올 때마다 더 이상 아프거나 슬퍼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공감을 하거나 위로를 할 수도 있다. 다만, 글로 표현했다는 건 스스로 어느 정도 치유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는지고민했다. 10년을 습작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글보다는 안에서 영글어지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방향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에 더 많은 고민을 했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면서 내 안에 스며들었던 작은 글자 하나하나가 문장이 되어 새로운 나를 완성시켜주는 생경함을 느꼈다.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에서 나오는 단호함과 창문에 비친 커튼의 어둑한 실루엣을 뚫고 나오는 깊은 고뇌도 글로 융합된다. 생각에 감정이 더해지면서 글이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누군가는 글 수준도 안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아직도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고 단어 뜻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손가락으로 옮겨지는 기운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글에서 큰 힘을 느꼈다. 흑연과 종이를 더하면 5g도 안될 텐데, 50kg이 넘는 사람을 주저앉힌다. 한 명이 아니다. 수 십명, 수 백명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물리와 수학을 배웠다면, 분명 불가능하다고 내뱉을 상황인데, 주변에서 기적 같은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그 기적에는 아픔을 치유하는 마법도 포함된다. 글이 가진 놀라운 능력 때문에 욕심이 생긴다. 마흔 해를 넘게 살아내며 갖고 싶은 팽이 하나, 먹고 싶은 초코파이 하나 말하지 않고 숨기며 살았는데, 이제는 드러내고 싶다.
글을 잘 쓰고 싶다. 50kg짜리 한 명만 움직여도 평생 반려자를 만날 수 있고, 두명만 다가오게 해도 함께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 길지 않은 삶인데, 나를 치유하고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부터 다지고 조금씩 글을 밖으로 향하려고 한다. 잔잔하게 들리는 냉정과 열정사이 연주곡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비춘다. 이젠 아프지 않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