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섯 번째이다. 숫자 열 부터 시작한 카운트다운이 일곱이 되기도 전에 다시 무우가 또 튀어나온다. 스핑크스 같이 생긴 갈색 오리 지렁이와 바퀴벌레와 흡사한 괴생명체에게 죽음을 당한 경영이는 씩씩거린다.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지만 경영이가 무우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녀석은 한번 꽂히면 다른 건 절대 돌아보지 않는다. 넓은 아량과 각종 공감의 기술을 가져와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오십 원짜리 동전 두 개가 오락기로 더 들어갔고, 결국 너구리 뱃속에 사백 원이나 넣었다.
일주일 용돈이 오백 원이다. 사백 원이면 현아네 분식에서 떡볶이 일 인분과 떡꼬치 하나를 먹고 새로 나온 이백 원짜리 와플 하나까지 사서 나눠 먹을 수 있는 돈인데, 저녁을 굶어가면서 오락실에서 진을 치고 있다. 경영이가 너구리 게임에 빠져있는 동안 기다리는 내 모습도 안쓰럽다.
갑자기 경영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으악 소리를 지른다. 오층 맨 꼭대기에서 너구리가 마지막 무우를 먹기 직전 오리 지렁이에게 공격당해 삐이이이이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면서 바닥에 떨어져 죽는다. 너구리는 추락사했다. 땅에 거꾸로 박혀있고 경영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이번 카운트다운은 셋, 둘, 하나와 함께 경쾌한 음악을 선물하며 초기 화면으로 넘어간다.
"띠이 띠이 띠띠띠 띠띠띠띠"
"에잇,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가야겠다!"
경영이는 포기했고, 기다리던 나와 함께 집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차라리 신상 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나 피파를 하면 이해하겠는데, 항상 고전 오락만 즐기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너구리, 갤러그, 서커스, 남극 탐험 같은 유형을 좋아하는 데, 집에서 겜보이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오락실에 와서 돈을 넣고 한다. 집에 있는 브라운관 티브이는 실감 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말한다. 화려한 너구리 점프 실력이 이십 인치 브라운관과 사십 인치 오락기에서 얼마나 큰 차이를 주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와 경영이는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오 년이나 줄곧 같은 반이었다. 옆 집에 살고 매일 등하교를 같이하는 죽마고우이다. 당연히 부모님들도 형님 동생이고, 자기 집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양쪽 집을 들락거렸다.
신체 발달 정도와 학교 성적, 운동 수준까지도 고만고만했다. 취미도 같았는데, 유일하게 다른 건 선호하는 오락뿐이었다. 나는 최신 게임을 즐겼고, 경영이는 고전 오락에 심취해 있었다. 방과 후 오락실에 가면 각자 좋아하는 게임을 했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즐기며, 취향을 존중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육 학년 첫 수업이 시작되었고 새로운 반에 모인 아이들은 신상 게임인 스트리트파이터의 각종 캐릭터에 대해서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방학 때 각자 연마한 기술을 이야기하느라고 정신없었다.
시끌벅적 한가운데 담임선생님이 들어왔고 첫날이라 반장을 선출한다고 했다. 제대로 반장선거를 하지 않았고, 대부분 관심이 없었으며, 선생님께서 누가 할래 한마디에 유정이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오로지 수업 끝나고 오락실에 가서 신상 스트리트 파이터를 할 생각뿐이었다.
점심시간 때 다른 학급 반장이 오더니 유정이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다른 학급 반장은 나가고 유정이가 교탁 앞으로 나와서 말한다.
"오늘 5반이랑 축구 시합하기로 했으니까 방과 후 운동장으로 집합"
티브이에서 탤런트 이덕화가 군복을 입었다가 다시 양복으로 바꿔 입으면서 했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배운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반장이 하자면 해야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직 우리 반 단합과 승리를 위해 뛰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얼마 전 운동장에서 텐트 치고 관람한 무서운 영화 주인공처럼 콩사탕에 의해서 입이 찢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린 안돼!"
경영이가 손을 들더니 오늘 새로 들어온 스트리트 파이터 오락을 하기로 해서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분명, 너구리 할 거면서 스트리트 파이터로 포장했다. 유정이는 어이없어하며, 대놓고 왕따 되고 싶지 않으면 참석하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교실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오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전자 멜로디가 울리면서 일단락됐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이학년 때부터 들고 다니는 육백만 불의 사나이 신발주머니만 들고 운동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다들 나왔는데, 경영이만 안 보인다. 반장은 나에게 찾아보라고 또 못된 지시를 한다. 할 수없이 교실 쪽으로 돌아가는데, 경영이가 가방까지 매고 뚜벅뚜벅 걸어서 정문으로 나간다.
"야! 차경영! 어디가?"
"어디가긴, 오락실 가지. 너도 그냥 가자! 김영태!"
맞다. 경영이와 나는 크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경영이는 한번 꽂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반장이 단합을 위해 모이라고 해도 어제 마무리 못한 너구리를 끝내야 하며 새로운 스트리트 파이트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난 엄청나게 고민이 됐다. 죽마고우와 우정을 지켜야 할지 무서운 반장 말을 들어야 할지 잠시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나약한 녀석! 난 오락실 갈 테니 넌 가서 굽신거려!"
고개를 휙 돌리더니 오락실 방향으로 경영이는 사라졌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경영이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운동장으로 걸어왔다.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 되어 흙밭에서 친하지도 않은 아이들과 명목상 단합으로 껍질도 없는 축구공을 굴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단결이라는 명분을 세우고 혼자서 뒤늦게 오락실로 향했다.
오락실 문을 열기 두려웠다. 항상 함께 했는데, 그날따라 오락실 출입문은 엄청난 벽이 앞에 놓인 것 같았다. 문을 열면 경영이는 왼쪽 여섯 번째 게임기에서 너구리를 하고 있을 테고,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두 칸 옆에 있는 스트리트 파이터를 한판 하면서 동향을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꾹 감고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여섯 번째 게임기 앞에 경영이가 없었다. 고개를 둘러보니 한쪽 구석에서 갤러그를 한다. 갤러그를 그리 잘하지도 못하는데, 분명 삐진 게 확실하다. 쪼르륵 뒤에 가서 조용히 지켜봤다.
은하계 행성들이 가득한 검은 우주에 나비와 파리같이 생긴 놈들이 날아다닌다. 미사일을 쏘다가 징그러운 나방 같은 놈이 빙글빙글 돌아서 우주선 앞에 멈추더니 거미줄을 발사한다. 우주선은 도망가도 될 법 한데, 거미줄에 걸리더니 나방 위에 올라타고 포로가 되어 적진으로 수용된다.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내 모습 같았다.
마지막 한대 남은 우주선이 튀어나와서 다른 파리와 나비를 공격한다. 경영이 손놀림이 빨라졌고, 드디어 포로를 호송하는 괴상망측한 나방이 두 바퀴 돌며 내려와 다시 거미줄을 쏜다. 갑자기 신 우주선이 거미줄 앞으로 재빠르게 움직인다. 작년에 배운 심일 소위가 수류탄을 몸에 품고 뛰어드는 모습과 흡사하다. 거미줄이 우주선에 닿기 직전에 미사일 한 발을 발사했고 정확하게 나방에 맞자 폭발하며 거미줄은 사라진다.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오더니 마치 내 모습 같았던 포로우주선은 몇 바퀴 돌면서 경영이 우주선 옆에 붙는다.
두 우주선이 합체되어 따발총으로 다른 악의 무리를 모두 물리친다. 나는 순간 환호성을 질렀다. 경영이가 내 환호성을 듣고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왔어? 스트리트 파이터나 하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스트리트 파이트를 하기 위해 함께 자리를 옮기는데, 축구를 마친 무리들이 오락실로 들어왔다. 우리보다 먼저 스트리트 파이트를 차지해서 할 수 없이 어려서부터 자주 하던 보글보글을 시작했다. 둘이 같이하면 백판까지는 기본이다. 오늘도 둘이서 구십 판을 넘어가는데, 옆에 스트리트 파이터를 기다리던 유정이가 한마디 한다.
"야! 사내놈들이 오글거리게 보글보글 같은 거나 하냐?"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똑같은 웃음을 보이며, 더 열심히 거품을 만들어서 터트렸다. 경영이는 손잡이를 놓더니 유정이한테 소리친다.
"반장! 너! 나랑 스트리트 파이터 한번 붙자! 보글보글 금방 백판 끝나니까 기다려!"
초록이가 무는 거품을 내가 동시에 물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난 네 번이나 이어서 하고, 경영이도 백 원을 투자하면서 결국 백판까지 갔다. 보글보글 백판은 거대한 괴물을 전기로 지져서 죽이는 잔인한 게임이다. 수분으로 구성된 거품과 전류를 적절히 흐르게 하고 전기로 몇 번 담금질해서 거대한 왕을 처참하게 감전사시켰다. 이제는 결전만 남았다.
스트리트 파이터 앞에 유정이하고 경영이가 나란히 앉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다. 어떤 캐릭터를 선택할지 궁금하고 방학 동안 연마한 신 기술도 자랑할 수 있는 자리이다. 하지만, 고전파 경영이가 불리할 게 뻔한데, 여전히 알쏭달쏭한 상태에서 난 경영이 뒤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다른 친구들은 전부 유정이 뒤에 붙었다. 특히, 동현이와 인성이는 유정이 뒤에서 응원까지 한다.
유정이는 예상대로 군인 캐릭터 가일을 선택했다. 소닉붐과 반달차기 달인 가일은 얍 싸비 기술 일인자 캐릭터라 주인공급인 캔과 류로 상대하기 버겁다. 대적할 만한 캐릭터는 같은 얍 싸비 기술을 써먹을 수 있는 장기에프나 곰을 놓쳐서 미쳐있는 사자처럼 생긴 블랑카 정도가 적당하다.
경영이 캐릭터 선택에 숨을 죽였다. 장기에프 쪽으로 커서가 이동하더니 갑자기 춘리를 선택한다. 말도 안 되는 캐릭터 선정이다. 패배가 확실하다. 가일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춘리는 나약하기 그지없는데, 고전만 연구하다가 결국 신문물에서 개망신당하기 직전이다. 나는 유정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고, 유정 뒤에 있는 동현과 인성은 벌써부터 이겼다고 너스레를 떤다.
게임이 시작했다. 예상대로 유정이와 꼭 닮은 가일이 소닉붐을 연신 쏜다. 어설픈 춘리 점프는 타이밍이 적절치 않아서 결국 소닉붐에 한방 맞고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반달차기 연속 세 번을 맞으면서 퍼펙트로 끝나버렸다. 유정이파는 환호성과 함께 시끌벅적해졌고, 보글보글 백판을 끝냈다고 자부하던 쭈글이 둘은 다음 판은 잘해보자면서 모니터를 주시한다.
두 번째 판이 시작되자 경영이 손이 빨라졌다. 거꾸로 풍차 돌기 기술까지 하며, 막상막하 전력을 보이더니 결국 아슬아슬하게 가일을 눌러버렸다. 춘리는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두발은 기형적으로 꺾으면서 좋아한다. 보고 있는 내 모습은 춘리와 다르지 않았다.
유정은 분노했고, 마지막 삼판 이승을 위해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나까지 째려본다. 나도 모르게 절대 존엄한테 소리를 질러버렸다.
"야! 오락이나 해!"
오리 지렁이인지 무지개 지렁이인지 내 머릿속에 있던 그 녀석이 하도 밟히다 보니까 꿈틀 했던 것 같다. 유정이는 당황했고, 그 순간 막판은 시작했다. 유정이가 현실에서 내 공격에 정신 못 차리는 동안 경영이 아바타 춘리가 하늘을 날아 가일 위를 올라가더니 지상 최대의 얍삽이 기술 발 뒤꿈치로 오십 번 누르기를 시작했다.
유정이 아바타 가일은 한번 막고 한번 맞고 다시 한번 막고 한번 맞는 것을 반복한다. 차라리 막지 않고 넘어지면 되는데, 당황한 것 같다. 가일 전투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결국 퍼펙트로 춘리가 이겼다. 우리 세계에서 얍삽이 기술은 인정하는 룰이었지만 유정이는 계속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이 뒤에 있던 동현과 인성은 어느새 우리 옆에 왔고, 결국 유정이도 고개를 떨궜다.
내 정의로운 친구 경영이 손끝에서 나온 형식을 파괴하는 얍 사비 기술은 계속 우기기만 하던 유정이까지 품으며, 우리 모두를 현아네 분식집으로 안내했다.
춘리가 춤을 춘다. 춤을 추는 춘리 밑에는 절대자 가일이 쓰러져 있고, 오락기를 뒤에서 지켜보는 나 역시 유정이를 밟고 춤을 춘다. 그 순간 억눌렸던 자아가 깨어났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굽신거리지 않게 되었다.
오락실을 나와 걷는 데, 해가 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하늘은 수정처럼 빛나고 친구들 눈빛도 반짝이며 모두가 맑아 보였다. 절대자로부터 해방된 느낌에자유롭고, 세상을 점복한 것 같았다. 이른 봄, 비와 눈이 섞여서 내리는 시기였지만 푸르고 꽃잎이 가득했다. 때마침 음반가게에서는 노찾사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계는 신나서 좋았는데, 이번 신곡 귀례 이야기는 오묘했다.
1991년은 스트리트 파이트 2가 출시된 해이다. 동네 오락실마다 붐이었고, 초등학교 대부분 아이들은 하루 종일 스트리트 파이터 이야기만 했다. 다른 기억은 다 잊었지만, 춘리와 함께 절대자와 가일을 밟고 춤을 추던 내 모습이 생생하다. 어느덧 삼십 년이 지났고, 우연히 한 아이 그림에서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악당을 물리치고 춤을 추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달랐다.
강력하고 딱딱한 줄만 알았던 가일은 다채로운 머리 색깔을 가지고 있었으며, 절대자는 생각보다 귀엽고 예쁜 분홍빛 얼굴색을 가졌다. 더군다나 밟혀 쓰러져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춤을 출 수 있도록 바닥에서 받치고 있었으며, 그 힘든 상황에서도 너그럽게 웃고 있었다. 결국, 동글이 그림 속 등장인물은 함께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응답하라 1991.
생애 처음으로 허구 이야기를 썼습니다. 동글이 그림을 보고 초등학교 때를 떠올렸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 주변에는 운동과 오락실, 방방, 다방구 등 각종 놀이를 하는 아이들밖에 없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오락을 즐겼는데, 제 기억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전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여서 오락실을 많이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육 학년 때 스트리트파이터 2는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1998년도 스타크래프트와 견줄 정도입니다. 저 역시 관심은 있었지만 영태처럼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아이 동화를 너무 과대 해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름답고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창작하기에는 제가 자란 환경과 생각이 많이 다르고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매거진 첫 편은 평소 일하면서 자주 쓰는 분석 보고서 스타일과 다른 분 위인 이야기를 콜라보했고, 이번 글 역시 주제와 조금 다르게 해석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흔 해를 넘게 살았고 어느 정도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보니 당장 바꾸는 것도 쉽지 않네요. 앞으로 제 글을 찾아가고 주제에 맞게 쓰려고 조금씩 더 노력하겠습니다. 전 이 글을 쓰면서 즐거웠습니다. 옛날 생각이 났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글에 녹일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글을 통해 소중한 옛 생각이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