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글을 쓰는 수준도 아니지만, 복잡하고 안타까운 생각에 그만두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삶에 대해서진솔한 이야기 한 편을쓰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평범했던 짧은 생을 글로 나열해봤자 지리멸렬하고 따분할게뻔했다. 다만, 글을 통해 행복했던 기억을 되새기고 함께 글 쓰기로 약속한 친구들때문에 다시 한번 연필을 꽉 쥐었다.그런 기분으로 글을 쓰니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일생을 어려움 한번 없이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순 없을 텐데, 어떤 이유로 매일 꿈속을 유영하며 구름 위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꿈속과 구름 위에서 살았으니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 삶은 영화같이 행복한 날만 가득했다.
70년 대 말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인천에서 달이 가장 가까운 동네, 만월산 끝자락에서 멀리 소래포구까지 내려다보면서 부푼 꿈을 품고 자랐다. 네 식구가 오손도손 잘 살도록 세 평이나 되는 큼지막한 방 하나에 두 가구가 사이좋게 공동으로 쓰는 야외 화장실이 달린 멋진 집을 아버지 매형이 구해서 거지 같은 우리에게 줬다.
한 해 정도 살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큰 딸을 위해 한 평 남짓하는 연탄 창고를 리모델링하여 문도 없는 아기자기하고 연탄 냄새 그윽한 개방형 방 하나를 더 만들었다.
아버지 매형은 공무원이었는데, 당신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동네에 살았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몇 년 살다가 이사했다. 옆집 형운이 아버지는 잡부, 앞집 창호 아버지도 잡부, 뒷집 광호 아버지는 목수, 신원이 아버지는 공장에서 돌아가셨고, 기명이 아버지는 같은 공장에서 일했는데, 유일하게 월급을 받는 신나 공장이었다. 아버지들은 일이 즐거운지 항상 술에 취한 상태로 귀가하는 흥겨운 동네였다.
당시 열악한 공장 환경으로 노동력이 착취되면서 신원이 아버지처럼 많은 가장이 죽어가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우리 아버지는 건강하게 집에만 계셨다. 동정심 유발이 주특기인 아버지 덕분에 집까지 거지같이 얻은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친구들과 거지같이 노는 게 재미있었다. 빈 병을 줍고 고철을 가져다가 고물상에 팔면 이백 원 정도 버는 수익 창출형 거지놀이를 즐겼다. 거지같이 놀던 친구들 중 다수는 착실하게 아버지 가업을 이어받아 삼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제 아버지가 다녔던 똑같은 용역회사에 이른 새벽부터 나간다.
거지같이 놀던 다른 몇 명은 내가 결혼하던 해에 인천 길병원에서 단체로 닭싸움을 했다가 공익시설에서 십수 년 동안 참회하고 지금은 간석시장에서 닭을 튀기거나 부평으로 이사해서 천진난만한 어른들이 좋아하는 불법 오락실을 운영하거나 개척교회 목회자가 됐다. 다른 거지 같은 한 분은 지 아버지처럼 공장에서 일찍 죽어버렸다.
우리 학창 시절은 구십 년대를 관통했다. 학벌도 좋지 않아서 어디서 배웠을지 모르겠지만, 방임적 자유주의와 서구 선진교육을 익힌 부모님 덕분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키자니아와 잡월드가 개장하기 삼십 년 전부터 남들보다 빠르게 직업 체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주변 부러움을 샀다. 다행히 국민학교 때부터 미리 논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신문을 배달하고 유통기한 지난 우유로 배고픔을 달래며 신체 발육에도 도움 되는 우유배달까지 체험할 수 있었다.
중학교는 운이 좋게 마을버스를 타고 이십 분만 가면 되는 곳으로 진학했으며, 거지 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갈 수 있었다. 근검절약 정신을 키우기 위해 버스는 잘 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하루에 두 시간씩 걸을 기회가 생겼고 춥거나 늦을 경우에는 뛸 수도 있었다. 무상 체력 단련 프로그램 덕분에 지금도 오 킬로미터를 가볍게 달린다.
키자니아 프로그램은 더 다양해졌다. 최신 간행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전단지도 돌리고, 요즘은 공단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하는 냄새 가득한 신나공장 잡무도 체험할 수 있었다. 손은 습진과 썩은 냄새가 진동했지만, 어려서부터 위생관리에 대한 의식이 확실하게 정립되었다.
운이 좋으면 주말에 용역시장을 따라나가 공사현장 차량 통제를 하고 삼만 이천 원이나 벌었다. 일당은 사만 원이었지만 힘들게 일을 알선해주는 존경하는 건달 같은 실장님께 이십일조를 상납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프로그램은 문화예술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밤 문화를 배울 수 있는 호프집 서빙과 내성적인 성격을 활발하게 바꿔주는 호객 행위까지도 체험 가능했다. 덕분에 평소 들어본 적도 없는 경상도 사투리가 가득한 영화 친구나 정우성과 임창정이 열연한 영화 비트에 나오는 모든 상황과 대사를 공감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는 친구 도움을 받아 빚 삼천만 원으로 열여섯 평짜리 어둑한 빌라 지하실을 얻었다. 결국, 십 년 뒤 두배 가까운 금액을 대부분 내가 갚았지만, 당시 큰돈을 빌려 첫 집을 장만했다는 게 고무적이다. 덕분에 등유 보일러를 처음 접했고, 기념으로 주유소 체험을 장기간 계약한 덕분에샐프 주유소가 처음 나왔을 때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고삼 때는 동네 전통을 이어받아 노가다 잡부는 계속했으며, 보다 전문성 있는 고임금 직업 체험도 할 수 있었다. 천장과 벽 내장재로 쓰이는 발암 물질 석고보드와 석면을 방송에서 난리 치기 훨씬 전부터 만져볼 수 있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거지같이 놀던 친구들은 대부분 운전면허를 딸 수 있었다. 면허증만 있으면, 직업 체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지기 때문이다. 다들 공부를 못해서 나를 제외하고 전부 실업계에 다녔지만, 필기, 기능, 주행까지 한 번에 붙었다. 떨어져도 자존심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학원 재 등록과 추가 응시 비용을 위해 석면만 몇 번 더 만지면 가능했기 때문이다.
면허증 덕분에 소형 화물차량으로 모래 운반을 하고 정식면허가 없어도 조작 가능한 로더 - 모래를 싣는 중장비 - 까지 다룰 수 있었다. 덕분에 더 이상 추운 곳에서 떨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체력 단련할 필요가 없어졌고, 연신 기침이 나오는 신나 공장이나 석면 작업을 할 필요도 없어지면서 우리 삶에 따뜻한 풀칠이 더해졌다.
IMF 시절 대학에 입학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공부를 못해서 사 년 전액 장학금을 받지 못한 게 한이다. 그래도, 거지 같은 친구들은 중졸과 고중퇴인데, 누구나 아는 대학교에 갔으니 개천에서 용 난 게 틀림없다. 거지 같은 집은 빨간 색종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배운 동정술을 활용했더니 친구 어머니께서 입학금과 한 학기 등록금을 선뜻 내주셨다. 당시 학자금 대출은 부모 앞에 신용이라는 단어가 붙을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키자니아는 사회와 다르지 않았다. 단지, 조금 창피하거나 무시만 당하면 된다. 병원에서 고인을 씻겨드리는 숭고한 일을 하거나 선거 운동을 하면서 연예인 코스프레도 할 수 있었다. 정해진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이 불법적으로 입금되면 내가 뽑아달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초중고 동창이 대학교를 등교하거나 회사로 출근하는 동암역 앞에서 몸에 색칠하고 플래카드를 흔들며 잠시 연예인이 되었다.
남들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 년 동안 복무하는 군대도 동일한 연유에서 이십 년 넘게 체험한다. 가끔 후배들이 사명감을 거론할 때면 초라하지만 덕분에 무슨 소리를 들어도 웃으며 답할 수 있다. 지금껏 했던 체험 중에 가장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고 보람 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과 군 복무만 했으면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을 텐데,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고 많은 혜택을 받아 국민학교 때부터 스무 개도 넘는 직업 체험했으며, 느지막하게 비슷한 환경을 극복하고 바르게 자란 단단한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며, 이제는 어쭙잖은 글 놀이도 할 수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유영하며 살아냈는데,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내 삶 모든 곳에서 성립한다.
둘이서 힘들게 파병 다녀와서 번 돈 전부를 결혼 비용에 쓰고, 누군가의 장난으로 진급자가 바뀌어도 웃으며 감내하니 다시 기회를 주며, 남들은 경험할 필요도 없는 피눈물 나는 가족 진급 누락도 몇 차례 경험하고, 비슷한 환경의 군인가족에게 사실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시당하며, 우리 도움 없이 못 사는 양가 어른들에게 매달 월급을 가져다주고, 그 어른들은 전부 암환자이며, 지금 우리 큰 딸이 둘째가 아니라 첫째여도 웃으면서 육아일기를 쓸 수 있는데,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