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남세아 Apr 20. 2022

남탕으로 들어갔다

해방감을 찾아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데, 혼자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소심하 차 시동을 다. 너무 빠르지 않게 천천동네를 벗어난다. 마음이 불편했는지 체한 느낌이 들면서 몸에 닭살이 돋는다. 체하면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고 걷거나 뛰는 게 좋지만 어슬렁 거릴 시간은 없다.


갑자기 멀미와 함께 헛구역질까지 난다. 지난주에도 동일한 증상이었는데, 코로나 후유증이 아닌지 걱정된다. 비교할 수 없지만 입덧 비슷할 것 같다. 아프다고 가족에게 말하니 걱정한다. 어리광 부리려다가 걱정거리만 건네줬다. 몸과 마음이 불편할 때 달리는 게 최선책인데, 차를 멈추고 내려서  여유는 없다. 곧 영업시간이 끝나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곳에 도착하면 모든 혈관이 확장되고 몸과 마음은 평온해지속도 편안해지기 때문에 액셀레이터를 조금 더 밟는다.


지축역이 보인다. 꽃다운 이십 대, 정신없이 빠르게 스치는 시간 속에서 선명한 기억이 남았다. 스물일곱 살 즈음 중대원들과 함께 걷던 길을 지난다. 당시 고양시를 헤집고 다녔는데, 어디든 걸어 다녔다. 황룡산, 고봉산, 심학산, 현달산 높지도 않은 나지막한 구릉을 산이라 부르며 정겨운 유니폼을 입고 삽질도 하며 전투하고 계속 걸었다. 보병장교가 아니었지만 보병부대 소대장과 중대장을 하면서 참 많이 걸었다. 그게 모자랐는지 이제는 산티아고 순례자 길까지 걷고 싶어 계획을 세운다.


차창 밖으로 유격장까지 걸었던 행군로가 보인다. 관산동과 삼송동을 거쳐 지축역을 지나서 북한산까지 이삼십 킬로미터를 서너 번 걸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많이 변했지만 한적한 마을길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는 장소도 걷다가 발견한 곳이다. 삼송에서 북한산으로 가기 위해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마자 보였던 곳이다. 육체적으로 피로가 가득 해지는 순간 눈앞에 나타났던 천국 같은 장소였다. 수년간 한참을 즐겼는데, 무려 삼 년 만에 다시 만난다.


서른 즈음부터 다니다가 방송에 나오고 리모델링까지 하면서 깔끔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많이 알려지면서 북적거리는 게 싫어 방문 횟수가 줄었지만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곳이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어스름이 내렸다. 차량이 몇 대 없어서 영업일이 아닌 줄 알았는데, 문 안쪽으로 희망의 밝은 빛이 보인다.


천천히 걸어서 카운터를 향한다. 카운터가 전에 있던 방향에서 반대쪽으로 바뀌었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새로 개장한 대형몰에 있는 깔끔한 곳을 할인해서 갈 때보다 비싼 느낌에 발을 돌리고 싶지만,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카운터에 계신 연예인 장모님 같은 분에게 카드를 내민다. 지지리 궁상처럼 돈을 아끼지는 않지만 생각한 것보다 가격이 비쌀 때,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호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가슴 깊은 곳 아니 단전 어중간한 부분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무엇이 목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오려고 한다. 아마도 그게 수년간 끊어왔던 욕이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결제는 했고 초등학교 때나 본 적 있는 회수권 같은 종이를 하나 받아서 계단을 내려간다. 지하는 불안하다. 목욕탕과 관련된 안 좋은 사건들이 떠오른다. 이런 생각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장애가 또 도졌는지 걱정하며 우발상황 발생 시 비상탈출구를 찾는다. 머릿속으로 워게임(예행연습)은 끝났다. 편안하게 신발장에서 뽑아온 열쇠 번호와 맞는 옷장을 찾는다. 카운터에 계신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옷장으로 향한다. 하필 아저씨와 가까운 쪽 번호를 뽑은 나를 원망하면서 아저씨 앞에서 스트립쇼 하는 기분이라 몸을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옷을 벗는다. 힐끔거리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지만 합리화한다. 아직 내 몸이 좀 괜찮지. 미쳤다.


탈의실을 지나 욕탕으로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한다. 이 순간이 제일 좋다. 미닫이문이라 더 기분 좋다. 왼쪽으로 문을 제치니 습한 기운이 몰려온다. 첫 번째 카타르시스다. 우선 사람이 없다.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지만 고즈넉하다. 나 빼고 두 명뿐이다. 옅은 온천 냄새가 난다. 아니 온천 향이다. 냄새는 불쾌할 때 표현하고 향은 좋을 때 표현하기로 했으니까 이제는 온천향이라고 표현한다. 향을 깊게 들이켜는데, 일반 물과 온천물 이 다름을 알기에 십여 초간 두 번째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한적한 온천에서 기분 좋은 향을 느꼈으니 다음은 온몸으로 온천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다. 탕에 들어가는 게 무조건 좋지만 좋은 물은 샤워만 해도 느껴진다. 어정쩡한 생각으로 살다 보니 비어있는 네 개의 샤워기 중에 두 번째를 택한다. 사십 도에서 일이도 정도 더 빨간 방향으로 온도를 조절하고 손잡이를 잡아 올린다. 순간 몸으로 떨어지는 맑은 기운들이 영혼을 적신다. 오 킬로를 달리고 시원한 샤워를 하는 것처럼, 후덥지근한 여름날 운동하다가 시원한 소나기를 만나는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과 우산을 버리고 촉촉하게 온몸을 적시는 여우비를 만나는 것처럼, 나를 적신 물에 몸이 녹는다.


전채 음식은 끝났다. 이제는 메인 요리이다. 평소에는 온탕, 냉탕, 사우나, 열탕 순으로 들어가지만 체한 기운이 있어서 몸을 빠르게 데우고 싶었다. 바로 사십삼이 보이는 작은 열탕 앞에 섰다. 사십삼부터는 뜨겁다는 느낌이 든다. 보통 사십일이가 좋은데, 그래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온천이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다. 숨에 몸을 탕에 맡겼다. 평소에는 발가락부터 천천히 들어가는데, 몸을 버리고 싶은 욕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두와 삼두 근처에 자글자글한 닭살이 보이며 순간 지금까지 참아왔던 야성의 포효가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고 목에서 뱉어 낸 나에게는 깊은 소리, 남에게는 불쾌한 신음을 아저씨니까 괜찮다고 합리화하면서 아버지 같은 두 분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다행히 전혀 관심 없다.


이제는 물의 매끄러움에 감탄한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비눗물 같은 매끄러움이 너무 좋다. 북한산 온천은 규슈 사가현의 우레시노 온천과 오사카 근처에 유명한 아리마 온천의 은탕과 비슷하면서도 매끄러움이 강하다. 하지만 날마다 물 컨디션이 다른 게 흠이다. 하루는 다른 물을 가져다 쓰는 것처럼 느꼈던 적도 있다. 더 큰 문제는 평소 사람이 많다는 것인데, 오늘은 아버지 또래 아저씨 한분이 나가니 스님 한분과 나만 남은 상황이 되었고, 삼 년 만에 만난 소중한 장소에서 스님과 함께 천국에 온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첫 의식이 끝난 다음에는 편안하게 삼사십 분을 이 탕 저 탕에서 유영하며 머물렀다. 몸이 한껏 달아오른 상황이 아까워서 비누칠도 하지 않고 몸을 말리며 탈의실로 향한다. 아직 삼십 분 더 영업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진이 빠지는 것을 느껴서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온천 주변은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산골처럼 많이 어둑해졌다. 전화기를 쳐다보니 부재중 전화 다섯 통과 카톡, 텔레그램 알림이 가득하다. 하나씩 확인해보니까 별로 시급한 문제가 없어 옆좌석에 던져놓고 블루투스로 연결된 노래를 듣는다. 김나영의 이별 후회가 내 플레이리스트 일 번이기 때문에 멋진 음색과 함께 캄캄한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깊은 해방감을 느낀다. 은퇴하면 이 기분일까?


* 사진속 장소는 다른 입니다(우레시노, 미야자키 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