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홍익대학교 유현준 교수가 발행한 책들을 보면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주로 융합의 시너지와 환경에 따른 문화와 공간의 형성이라고 생각되는데, 나도 좋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가 존경하는 유명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을 우연히 몇 번 방문하면서 익숙한 느낌에 친근감도 생긴 것 같다. 유교수의 책과 타다오의 건축물에서는 유독 공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을 말하지만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라는 뜻의 장소와 유사하다. 그러다 보니 보통 '공간'과 '장소'를 혼용해서 많이 사용하는데, 우리말 '곳'도 제법 사용한다. 영문 Space와 Place로 구별되서인지 '공간'은 비어있는 느낌이 있고 '장소'는 활용성이 높은 것처럼 생각되며, '곳'은 대중없지만 이곳, 그곳, 저곳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곳은 아내와 함께한 추억이 깃든 장소로 우리에게는 소중한 공간이었다.'처럼 쓸 수도 있는데, 나는 '장소'보다는 '공간'과 '곳'이란 단어가 느낌이 좋다. '공간'은 비어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채울 수 있고 '곳'은 그냥 우리말이라서 좋으며, '장소'는 과거와 형식적인 느낌이 조금 든다.
나는 정착보다는 유랑을 꿈꾼다. 요즘은 잠시 정착하여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기억하면서 글로 풀어가고 있다. 평소 유랑을 꿈꾸다 보니 특정 장소나 공간을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될 텐데, 살면서 몇 곳이 그립고 생각난다. 직업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이사를 많이 하다 보니 집에 대한 애착은 없지만, 주변에 추억이 깃든 장소는 몇 곳이 있다. 아쉽게도 얼마 전부터는 스타벅스와 블루보틀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추억이 깃든 장소는 다른 매개체를 통해서 나에게 다가왔고 그 장소는 삶에 조금씩 녹아들어 있다.
'Peace of mind'는 홍천 가리산 자락에 있던 작은 빵집이었다. 2004년쯤으로 기억하는데, 책을 좋아하는 후배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고, 휴일에 함께 자전거를 타고 처음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 부부는 CEO 남편과 빵 굽는 아내란 책을 집필했고 지금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많이 유명하다. 힘들게 자전거를 타고 가서 커피와 빵을 먹었는데, 푸짐하게 더 준 것도 좋았지만, 자신의 삶을 젊은 청년들에게 당당하게 소개하면서 행복해하던 모습이 비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도 여러 번 방문했고, 빵집이 춘천으로 옮겨 간 뒤에도 몇 번 갔는데, 내가 강원도를 떠나 이천으로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장소이다.
'Heart wine'은 용산역 근처의 작은 와인 샵이었다. 2011년 어느 날 대학로에 있는 브라질 스테이크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함께 식사를 하며 와인을 마시다가 우연히 와인아카데미에 대한 안내를 받았고, 2~3개월 정도 수업에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와인에 흠뻑 취해있어서 관련 책도 많이 읽고 와인도 많이 마셨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 중에 와인에 대한 조예가 깊고 직접 강의까지 하는 사람이 용산역 인근에 샵을 열었다는 말을 듣고 와인아카데미 동기들과 여러 번 방문했다. 사장께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아내도 그곳을 좋아해서 함께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겼고, 타지에서 온 친구와도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자주 가진 않았지만, 와인을 구입하거나 손님들이 방문할 경우에 함께 했던 소중한 장소였다. 그곳도 내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장소이다.
'Aesop'은 양주시 남면 신산리에 있는 작은 커피숍이다. 아직까지 그곳에 그대로 있고 지금은 확장해서 장사도 잘 된다고 들었다. 2010년 제주 여행에서 처음 만난 바리스타의 멋과 커피의 맛에 흠뻑 빠진 우리 부부는 제주 '신비의 커피'와 비슷한 느낌을 찾으려고 휴일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당시 유명하다는 드립 커피는 다 마신 것 같다. 그러다 2014년 내가 서울에서 양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한적한 동네에서 바쁘게 일하던 중에 동네 조용한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또래에 커피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사장님과 커피에 대해 관심이 많은 아내가 먼저 친해졌고, 집에서 가까워서 자주 찾게 되었다. 좋은 원두를 로스팅하면 직접 연락도 주고 한 번은 자신이 연습한 노래까지도 불러준 재미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커피와 함께 좋은 추억을 쌓았지만, 내가 양주를 떠나 고양으로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장소이지만, 가끔 한 번씩 다녀온다.
'옥정달빛과 옥정꽃집'은 내 인스타 첫 피드의 주인공이다. 양주시 옥정지구에 있는 작은 커피숍과 더 작은 꽃집이다. 옥정달빛은 커피숍인데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머문 적은 없다. 맛있는 커피와 비스킷이 좋아서 후다닥 먹어버리고 추가로 더 사서 나온다. 지금은 이사를 해서 두세 달 만에 한번 정도 들르는데, 그 바쁜 와중에 사장님께서 인사도 정겹게 해 주시고 이것저것 챙겨준다. 진심으로 그만 챙겨주셨으면 한다. 큰딸 둘이 나이가 같아서 친해진 것도 있지만, 지금 유명해진 것을 보면 옥정달빛의 맛과 친절, 장소와 공간에 대한 사장님의 이해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정꽃집은 Buencamino flower란 상호도 있다. 사실 난 부엔 카미노 플라워가 더 좋다. 두 자매분이 운영하는데, 우리 가족의 모든 행사는 이 집 꽃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생각나는 소중한 곳이다. 가게는 좁지만 꽃집 특유의 매혹적인 향과 산뜻한 분위기가 좋고 최근에는 아담한 화단도 만들었다. 잠깐 들를 때마다 꽃의 아름다움과 플로리스트의 감성이 탁월하다는 것을 느끼지만 무엇보다 자매분들의 정성과 사랑이 더 큰 아름다움을 선물해준다. 두 곳은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방문하는 유이한 단골집이기도 하다. 옥정달빛과 옥정꽃집은 우리가 다시 찾는 소중한 공간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조금 아쉽다. 이곳들은 이사도 했고 많이 멀어졌지만 꾸준하게 다시 찾아가는 소중한 곳이다.
'너의 작업실'은 고양시에서 가장 핫한 밤리단길에 있는 작은 독립 책방이다. 당연히 아직까지 있으며, 추억을 쌓아 가는 중이다.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됐다. 2021년 늦은 봄, 밤리단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책방 하나를 발견했다. 책방 내부가 훤히 보여 주변을 서성이며 안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너의 작업실에 앉아 있으면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하여튼,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선 사장님이 까칠한지, 내부는 깔끔한지, 조용한지, 구성원들은 이상하지 않은지 꼼꼼하게 지켜봤고 한 순간 느낌이 왔다. 여기다. 다음에 꼭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바쁜 일로 인해 그냥 지나쳤다. 며칠이 지난 다음 쉬는 날 처음 방문했고, 한참 읽던 책 '태도에 대하여'를 가져가 완독하고 몇 권의 책을 사 왔다. 느낌이 좋았다. 넓은 창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책과 그림은 전시회에 온 것처럼 조화롭게 걸려 있었으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친절이 가득한 곳이면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넘쳐 조용하게 혼자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좋은 곳을 발견하면 바로 아내에게 이르는 성격이라 아내와 함께 방문도 하고 몇 번 더 다녀왔다. 아내는 사장님이 인상 깊다고 했는데, 모르는 손님만 있는 상황에 대수롭지 않게 산책을 나간다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한다. 무엇보다 '너의 작업실'을 통해 알게 된 미라클 모닝과 글쓰기가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아직 현재 진행형이라 삶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아내를 만난 것 다음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책과 잔잔한 음악, 그리고 향기가 가득한 곳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싶다. 그래서 인기가 없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한다. 하지만 좋은 곳은 향기가 널리 퍼질 수밖에 없기에 이곳 사랑스러운 공간도 추억만 남은 장소가 될까 봐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내가 고양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도 '이곳은 자연스럽게 멀어지지 않을 공간'이다.
나에게 다가온 장소와 공간은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곳들은 빵과 와인, 꽃 그리고 커피와 책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 함께하는 공간은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기에 내가 어느 장소에 있어도 다시 찾을 수 있는 존재였으면 한다. 지금은 없어지거나 조금은 변한 장소와는 다르게 '너의 작업실'은 처음 느낌 그대로 '모르는 손님들이 있어도, 가게를 버리고 산책 나갈 수 있는 사장님'처럼 엉뚱하면서도 편안하게 내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 어쩌면 유랑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 가끔은 정착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