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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Jul 09. 2022

첫 경험,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

"야! 큰일 났어! 재연이가 가정동에 잡혀있데!"


주안역 앞 술집이 즐비한 골목의 허름한 커피숍으로 진서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그날은 일일 찻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술 파티를 하는 중이었는데, 진서 한마디에 안에 있던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적막이 흘렀다.


"야. 뭐해. 빨리 가야지!"


내가 한마디 하고 일어서자. 도윤이와 상태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왔다. 고려예식장 앞에서 대기 중인 택시를 타고 가정동으로 향했다.


잡혀있는 재연이는 우리 오파의 정신적 지주이다. 오파는 친한 네 명이 결성한 조직으로 학교는 잘 다니면서 주안이나 관교동에서 주로 놀고 일일찻집이나 미팅을 주선하는 조금 허접한 단체였다. 우리 학교에는 오파 외에도 우스꽝스러운 조직이 하나 더 있었다. 제파인데, 정식 명칭은 제물포 파이다. 참고로 오파의 정식 명칭은 오순도순 파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꼴망파, 식구파처럼 조직폭력 단체명을 따라 하는 유치한 '고딩' 단체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조금 불편한 존재일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일진 같은 존재였다.


 단체는 활동 지역이 달랐다. 제파는 제물포와 부평에서 놀고 오파는 주안과 관교동, 월미도에서 활동했다. 가끔 구성원 생일에는 상대방을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하고 일일 찻집을 열면 서로 방문해서 함께 노는 분위기였다. 다른 지역이나 타 학교 인원들과 마찰이 생겨서 다툼으로 커지면 함께 몰려가서 패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재연이는 170cm도 안 되는 작은 키지만 '깡다구' 하나는 부평과 주안, 제물포까지 인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농구선수 이상민 같은 외모에 하얀 피부, 옅은 갈색 생머리에 중저음 목소리까지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인천 출신 연예인과 사귈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여자 친구와 연관되어 마찰이 잦았고, 그날도 어김없이 여자 친구 문제가 화근이었다.


우리가 탄 택시는 재연이가 잡힌 콜롬비아 공원 앞에 멈췄다. 날은 어둑해졌지만 공원은 가로등과 농구장 조명으로 대낮같이 환했다. 농구장 한복판에 누워 있는 사람이 보였고, 그 주위를 십여 명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중  명은 '각기목'까지 들고 있었다. 가까운 벤치에 교복 입은 여자아이 두 명 울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한 우리는 상대방 숫자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재연아! 내가 살려줄게! 걱정하지 마!"


둘러싼 놈들을 제치고 재연이를 짊어졌다. 뒤따라 오던 상태 다른 한 명에게 날아 차기를 했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오직 정신을 잃은 재연이를 업고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둘러업고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았는데, 누군가 내 옆구리를 강하게 때렸다. 재연이를 업은 상태에서 주저앉았고 다시 누군가 휘두른 발차기에 맞은 상황까지가 기억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농구장 한편이었고, 얼굴과 입술이 터진 상태도윤이가 보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멀쩡한 재연이가 내 앞에 앉아있었다.


재연이가 그쪽 무리와 실랑이를 하다가 밀려서 넘어진 것은 맞다. 재연이가 밀려 넘어진 상황에서 경찰을 부르라며 누워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늦게 도착한 우리는 재연이가 다른 패거리한테 맞아서 쓰러진 줄 알았고 상대방을 밀어 제친 나와 날아 차기를 한 상태 때문에 더 큰 싸움으로 번졌다.


적으로 불리했고 조금 더 크게 충돌했다면 사상자까지 발생할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대 맞고 기절한 나로 인해 상대방이 놀라서 도망쳤고, 상황은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공원 벤치에 잠시 눕혔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정신 차린 것이다. 조금 멋쩍었지만 그 사건으로 우리는 보다 돈독해졌다.


그렇게 일 년을 같이 보냈다. 함께 을왕리나 대천으로 여행가고, 술도 마시며 조금 노는 평범'고딩'처럼 지냈다. 가끔은 공사장에서 '노가다'를 하고 번 돈으로 다시 놀러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거짓말처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지구 과학반이었는데, 잠시 뒤로 미루었던 학업에 집중했다. 상태도윤이는 생물반이었는데, 대학 진학을 위해서 체대 입시에 열중했다. 재연이는 문과였는데, 다른 친구들과 계속 어울렸고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넷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각자 가는 길은 달랐지만, 우스꽝스러운 오파라는 단체로 인해서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오면서 연락은 점차 줄었고 서로에게서 조금씩 잊혔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처럼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인연은 금 더 이어졌다.



며칠 전 운동장을 달리다가 우연히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내리는 장관을 목격했다. 목표치가 남았기 때문에 더 달려야 했지만 무엇인가에 이끌려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름 사이에서 땅을 비추는 영롱한 햇빛은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빛의 향연에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이십 년 전 내 삶에서 가장 먼저 떠난 친구 재연이가 떠올랐다.


학창 시절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을 함께 찍었던 그 녀석이 갑자기 생각난 것이다. 우리 곁을 떠나기 일주일 전 갑자기 전화해서 보고 싶다길래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약속 날을 지키지 못한 채 캄캄하고 비좁은 달동네 빌라와 빌라 사이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더군다나 연락두절 이후 한참을 지나서 찾았다. 사인 불명이라고 했는데, 결국 자살로 결론 내렸다. 결과를 그대로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슬펐지만, 군에 있다는 이유로 영정사진조차 볼 수 없었던 나는 아직까지도 재연에게 죄를 지은 기분으로 산다.


고작 스물다섯에 떠났다. 어느 사랑스러운 드라마 제목에 포함된 스물다섯이다. 내가 영광스럽게 임관하고 강원도에서 멋지게 소대를 지휘한답시고 의기양양 뛰어다닐 때 재연이는 빚에 쪼들리고 술에 쩌들어 다가 빌라 사이에 낀 상태로 스물다섯 살에 멈춰버렸다. 이번에는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 번뿐인 삶이기에 기회가 된다면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쪽을 택한다. 아파도 보고 슬퍼도 하며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쌓아가는 게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다양한 경험은 우리를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주며,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까지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힘들고 아픈 경험도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 죽음이라는  경험은 오랜 시간 기억에 머문다. 이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무섭고 힘든 생각이다. 마흔을 넘기고도 고작 죽음 따위에 두려워서 벌벌 떤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을 이겨내고 싶다.


그나마 글쓰기를 통해서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고통과 슬픔을 조금씩 꺼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제는 행복한 삶으로 무섭고 힘든 생각을 덮었으면 한다. 잊고 싶은 게 아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조금 더 다가가서 웃으며 안부를 전하고 싶다.


"재연아 잘 지내지? 오랜만이다! 다음에는 네 앞에 서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창은 잠시 닫아 놓겠습니다.




이번 주 : 첫 경험

다음 주 : 폭로전


* 이전 글 : 바비 차영경 작가님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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