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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Jul 03. 2021

세월에도 장사 있다

당신의 영광의 순간은 지금입니다



 옛 속담에 "세월에 장사 없다"란 말이 있다. 아무리 탁월한 장사라도 전성기가 끝나고 세월이 흐르면 절정의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능력이 감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인생의 절반쯤 지나는 시기에 많이 공감한다. 장사는 몸이 우람하고 힘이 센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인생에 있어서는 신체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부분을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절정을 이루는 시기를 말할 수 있다. 건강과 체력 그리고 삶의 영역과 활동량을 따졌을 때 생물학적 장사를 유지하기에는 서른 즈음이 최적이고, 경험과 일 그리고 결혼과 육아를 중심으로 사회적인 장사는 불혹 즈음이며, 심리와 관계 그리고 지혜로움과 회복탄력성을 기초로 철학적인 장사는 지천명 즈음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장사로움이 절정'일 때가 인생 최고 영광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다.


  90년대 최고 인기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인 강백호가 자신의 영광의 순간을 전국대회 우승학교인 산왕공고와 시합 중에 안 선생님께 말했고, 테니스 스타 조코비치와 메이저리거 류현진, 축구선수 손흥민은 지금이 전성기로 장사로움의 절정을 보내고 있다. 대부분 절정의 변곡점을 지나서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면 영광의 순간을 그리워하거나 추억으로 삼고 보다 느리게 내려가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버틴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성을 무시하고 대한민국 지하철 무료승차권이 발급되는 65세의 나이에 장사로움이 절정인 인물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바로, 까칠한 사위와 함께 살고 계신 내 장모님 박 여사다.




 1955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베이비붐 시대를 거쳐 MZ세대들이 살아가는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들이 겪은 비슷한 삶을 살았다. 단지, 2010년 국제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이역만리 동명부대로 파병 간 못난 사위를 처음 만나기 전까지는 당신의 삶은 순조로웠다. 그해 10월 레바논 국제평화유지단의 정보장교와 간호장교가 6개월간의 파병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하자마자 결혼하면서 박 여사의 자녀는 입양한 큰아들을 포함하여 둘에서 셋으로 늘어났다. 덕분에 입양한 큰 아들과 막내딸의 군사교육 수발을 시작했고, 11년간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특히, 2013년 겨울, 막내딸 임신으로 거동이 불편하자 열일 제쳐두고 광주의 집을 내팽개치며 서울로 올라와 첫 손녀를 맞이하면서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었다. 그 후로 첫째 손녀의 육아를 8년째 온전하게 전담하고 있으며, 4년 전부터는 올해 미운 네 살까지 사람으로 만드는 중이다.


  첫째 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살다 보니 어느새 군인 가족이 되었고, 군인 가족의 애환 중의 하나인 이사의 달인이라는 부캐를 받으셨다. 평생 한번 이사하지 않다가 8년간 9번의 이사를 통해 이삿짐 패키지화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익혔고, 이사 전 지형정찰과 이사 후 후속조치에 대해서도 군사교육을 받은 수준으로 함양하셨다. 최근에는 코로나 최전선에서 의무대장 임무수행을 하는 딸을 기러기 엄마로 보내고, 그렇게 불편하다던 사위와 한집에 살면서 '하숙집 주인장'과 동시에 손녀 둘의 '할머니 엄마' 역할을 병행하고 있다. 다른 아들과 며느리는 국위선양을 위해 중국에서 고군분투 중인데, 수시로 생활물품과 선물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보내준다. 고령의 시어머니는 전남 나주에 계신데, 코로나 상황으로 직접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수시로 연락드리고 불편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며 정성을 쏟고 있다. 게다가 하필이면, 아들 넷 중 장남 며느리로 시집와서 맏며느리를 해야 하니 차례와 제사를 전담하면서 전국에 있는 아랫 며느리들을 조정통제까지 한다.

 

 이런 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몇 해전 사위와 딸이 진급시기가 되자 3년간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하루도 빠짐없이 108배를 하셨고, 그 결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다 하숙집 주인님 덕분이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해내고 있는 장모님은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 대위보다도 건강하지만, 몹쓸 손녀들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는다. 힘들게 키워준 손녀가 어리광을 부리며, 가슴에 못이 박히는 말을 할 때면, 찰나에 눈가의 촉촉함이 보인다. 애써 들킬까 봐 웃음으로 승화하고 장난으로 에둘러도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는 현실이 속상할 뿐이다.


 30년 전 아들, 딸을 교육했던 지금은 흐릿해진 기억에 손녀들을 데리고 동네 놀이터에 나가 당신 딸보다도 어린 엄마들에게 어색한 신조어를 섞어가며 육아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낸다. 침침한 눈으로 육아 관련 책도 읽고 어려운 인터넷을 손수 찾아가면서 부족한 전문지식을 메꾸며 손녀들의 훈육에 매진한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의지하는 남편도 몇 해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장모님께서는 큰 충격과 함께 간호를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려 했으나 사위와 딸의 수발과 손녀들의 육아를 위해서, 아니 대한민국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군인 자녀의 엄마로서 임무 완수를 위해 지금껏 함께 계신다. 군인 가족으로서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장사 시기를 이십 년 이상 넘겼지만 장사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본인이다. 최근에 이슈가 된 다방면에서 너른 활약을 하는 "폴리 매스"의 주인공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있다 보니 몸에 잔고장이 하나씩 나타난다. 자신의 것은 하나도 챙기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눈, 귀가 아프신데, 보고 듣는 것이 문제 되면 예쁜 손녀들을 못 돌본다고 느리게 아프기 위해서 짬짬이 시간 내어 화투와 드라마 시청에 매진하신다.

 

 이렇게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는 우리 장사는 아직까지도 예쁜 꽃이 어울린다. 오늘 저녁 퇴근길에 사랑과 존경을 듬뿍 담은 비올라 한 단을 선물해야겠다. 오늘도 하숙집 주인장께서는 손녀의 예쁜 사진에 당신이 나오게 되면 사진을 망칠까 봐 슬그머니 뒤로 숨는다.

(비올라는 세 가지 멋진 색을 가진 삼색제비꽃으로 미니 팬지라고도 불리며, 꽃말은 나를 사랑해 주세요와 나를 생각해 주세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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