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남세아 Sep 18. 2021

눈 속의 아이


 두 딸의 다툼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브런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매일 다투는 두 자녀의 화해법'을 써 볼지 고민하면서도 금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남들이 읽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점점 쓰고 싶 글이 생긴다. 이제 숫자에 초연해질 수 있는 건가? 오늘 생각이 다다른 곳은 누나다.


 우리 남매는 그냥 현실 남매이다. 서점 가판에 놓여 있는 이나중 탁구부 주인공 같은 아이가 표지 모델인 현실 남매와 비슷하다. 대부분 남매는 사이가 좋지 않다. 사랑하지 않는데 동거하는 이성이다. 어려서부터 볼 것 안 볼 꼴 다 보면서 한 장소에서 사춘기까지 지내며 함께 자라다 보니 다툼이 잦고 결국 서로의 치부도 알게 된다. 그래서 포장된 모습을 질색팔색 할 수도 있다. 다 그렇다는 게 아니고 내 경우가 그렇다. 가끔 주변에서 사이좋은 남매도 본 적이 있다. 한두 번 정도.




 우리는 네 살 터울이다. 네 살 많은 그 아이는 정말 예쁜 이름을 가졌다. 눈 속의 아이 '설아'다.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누나 이름을 쓰는데, 눈물이 난다. 현실 남매인데, 이름 두자키보드로 눌러쓰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에 한  연락하는 사이고 경조사 때도 매형이 전화하거나 내가 매형한테 전화하는 사이인데, 왜 누나 이름에서 눈물 나는지 모르겠다. 가을이라서 그런가 보다. 혹시나 해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써도 눈물 나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를 써도 눈물 나지 않는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까칠하기로 유명한 '눈 속의 아이'는 건조한 내 눈 까지 미워해서 어울리지 않는 액체로 덮는지 모르겠다. 가슴속에 무엇을 남겼기 때문인지 궁금해졌다. 원인을 찾기 위해서 기억을 되돌려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두 딸도 네 살 터울이다. 요즘 매일 싸우는 모습이 유년시절 우리와 똑같았을 텐데, 어렴풋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첫째 딸보다는 '눈 속의 아이'가 몇 배 괴팍했다. 평소 운동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으며, 당당한 말투와 똑 부러진 외모로 모든 선생님과 친구들이 좋아하던 전교 부회장 '설아'는 내 형용사이기도 했다. 난 그렇게 유년기와 초등학교 6년까지 13년 이상을 설아 동생으로 살았다. 당연히 설아 아빠와 설아 엄마가 우리를 키워주셨다. 투를 하거나 부럽지 않았다. 오히려 누나의 후광을 받아 학교생활도 편했고, 가끔 백일장이나 미술대회에 내 대신 위작을 만들어 줘서 입상했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변에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질투보다는 기쁘고 자랑스럽다. 그렇게 내 기억 속에는 대통령 같은 눈 속의 아이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친구들과 놀기 바쁘던 시절 그 아이는 대학생이었고, 같이 살았지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잘한다고 했는데, 어떤 연유에서 좋은 대학을 가지도 못했고, 늦게나마 편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의 방황이 절정에 들었을 때 모든 것을 저버리고 떠난 나에게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이 그 아이였다. 부모도 포기하려고 했던 설아 동생을 찾는다고 우는 목소리로 녹음한 아이가 '설아'다. 덕분에 마음을 돌렸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말 어려운 형편에 동생과 학교를 다니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을 둘 다 아이를 키우며 마흔이 훌쩍 넘은 시점에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계속 공부를 하면 누군가는 꿈을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눈 속의 아이의 그 흐느낌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맙다고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설아는 좋지 않은 소식을 가장 먼저 내게 전하는 존재이다. 추운 날 눈밭에서 있다 보니 차가운 기운을 몰고 올 수도 있다. 몇 해 전 그토록 단단한 설아가 적절하지 않은 시간에 이례적으로 전화했다. 내 폰에 이름 세자가 찍히는 것 자체가 두려웠기 때문에 받기 싫었지만 어차피 현실을 저버릴 수 없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역시나 울면서 말한다. 제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슬픈 메시지는 내 귀를 통과해서 머리를 거쳐 눈에서 마무리된다. 아버지의 암 소식이다.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나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짜증 섞인 말투로 끊으라고 했다. 그렇게 설아 동생은 정확하게 상황을 모르면서 울지 말고 앞뒤 정황을 따져보라며 당당한 말투와 똑 부러진 성격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사랑받던 전교 부회장을 다그쳤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섰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아직도 미안하다고 하지 못했다. 다만, 전화번호에 저장된 사무적인 이름을 '누나'로 바꿨다. 얼마 전 어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매형이 아닌 누나가 내게 전화를 했다. 늘 그렇게 누나의 떨리며 우는 목소리로 내 삶의 희로애락이 시작된다.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 알았다. 내 삶의 희로애락이 아니고 우리는 희로애락을 같이 해야 하는 남매다. 당연한 일인데,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해서 가까운 곳도 잘 헤아리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인데, 지금껏 한 번도 고맙고 미안하며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누나 나이가 마흔일곱이 되도록 그러지 못했다. 못난 동생과 함께 살아온 고생 많은 누나를 이번 추석에 만난다. 이번에는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꼭 한 번을 얘기하고 싶다. 당신 덕분에 외롭지 않았고 지금껏 살 수 있었다고 그러니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잘 지내자고. 누나야 강변 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