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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Jul 23. 2021

동성과 긴 시간 통화하는 남자들

당신과 내 삶의 일부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래. 잘 지내고 또 통화해!"

"너무 좋다. 이렇게 통화라도 할 수 있어서. 또 통화해"


 코로나 상황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며 어렵게 통화를 이어가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마흔을 넘긴 아저씨 둘이서 맨 정신에 한 시간 동안 통화를 마치는 시점에 나눈 마지막 대화다. 나와 LA에 사는 친구 J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간을 내어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내와도 10분 이상 통화하지 않는 것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와 평소에 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주로 카톡이나 텔레그램으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직접 만나서 사랑스러운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많이 한다. 글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변명인 것 같다.




  J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알게 되어 이십 년이 넘도록 친하게 지냈다. 지금은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 천사들의 도시에서 고군분투하며 잘살고 있다. 나와 한 달에 한 번씩 연락하여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며 공생하는 관계이다. 어제는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나는 오랜 휴식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최근 한 달간 연락이 없었던 J의 안위가 궁금하여 메시지를 보냈고, 바로 전화가 왔다. 둘이서 한참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을 때쯤 59분이라고 적혀있는 숫자를 보고 새삼 놀랐다. 그나마 내가 출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서둘러서 끊은 결과다.


 나는 시간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시간 활용법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한다. 업무를 할 때도 용건만 말하거나 결론을 먼저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추천코스를 선정하는 알고리즘처럼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루한 토의나 남들의 시간을 조금씩 가져다 드시는 사람들 때문에 소비되는 시간을 진심으로  아까워한다. 누구나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싫어하는 것과 뜻을 같이한다. 그런 내가 한 시간 통화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매번 대화할 때마다 '행복한 소비'를 했던 것 같다. 가족과 자녀의 안위도 묻지만, 각자의 가치관에 대해서 서로 말하고 들어주며 격려와 조언을 한다. 특히, 무심한 남자 친구들 간에는 대부분 친근감의 상징으로 장난 섞인 말이나 욕설, 아니면 비언어적 표현 방법을 많이 활용한다. 생각해 보니 이 부분은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그것들과 결이 조금 다르다. "ㄱ", "o"처럼 자음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해야 하거늘 우리는 마치 '진부한 시사 토론'을 하는 듯한 분위기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소중한 시간이기에 매번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정리한다. 둘의 대화에는 웃음기가 싹 빠진 진지하고 차분한 대담을 진행하는데, 어제는 '행복을 정의하기 위한 몰입과 집중의 중요성'과 '글쓰기로부터 얻는 삶의 진리'가 주제였다. 주제를 정하고 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어제 대담의 본질은 각자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최근 생각을 공유한 것이다.  통화를 마친 다음 나는 J가 알려준 몰입과 집중에 대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개념을 정리 중이며, J는 SNS의 내가 발행한 글을 실컷 읽고 자기 생각과 한 편의 글을 써서 나에게 보냈다. 자신에게 의미를 새기게 해 준 글과 재미없고 지루했던 글까지도 꼼꼼하게 읽어보고 답을 해줬다. J가 보낸 글을 읽어보니 제법 잘 쓴다. 생각을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이어가고 설득력도 있다. 아프리카와 유럽, 그리고 지금 거주하는 미국 등 해외에 오래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치관도 뚜렷하고 선천적으로 세심하고 배려심이 있어 글에서 향기가 난다. 평소 J의 한마디 말이 내가 살아가는데 큰 이정표가 된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늘 고맙다고 말한다.


 둘의 성향은 아주 다르다. SNS의 활용법을 봐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소통과 공감을 위해 많은 것을 알리고 다른 누군가의 생활을 들여다보며 지금의 소중한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SNS를 많이 활용한다. J는 SNS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본인이나 가족사진은 당연히 없고, 그나마 지인들과 우리 가족사진을 보기 위해서 가끔 활용하는데, 우리 8살짜리 큰딸이 사용하는 수준과 비슷하다.


 사실 내 버킷리스트 중에는 J와 관련된 내용이 두 개 있다. 하나는 J가 사는 곳에서 가족들끼리 여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이다. 순례자의 길은 아내 하고도 걷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내와 J 둘 다 평발이다. 그래서 난 40일을 온전하게 걷고, 둘은 각자 구간을 나눠서 자전거나 차량을 이용하며 일정 구간만 함께 걷는 것으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은데, 세부 일정은 천천히 계획해야겠다. 두 가지 모두 실행 가능성이 높은 희망 사항이다.




 J와 나는 과거의 많은 추억을 함께했고, 현재는 잘 사는 것에 대해 같이 생각하며 미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생의 동반자'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서 전혀 다른 삶을 각자 잘 살고 있지만, 힘든 순간 언제든지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친구다. 최근 십 년간 단 한 번밖에 못 봤고, 3~4개월씩 연락을 못 한 적도 여러 번 있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내 가장 소중한 친구이다. 몸이 멀리 떨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손발이 오글거릴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둘 사이에서는 멋진 우정이 펼쳐진다. 우리는 마치 정우성과 이정재의 브로맨스처럼 생각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로남불'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우리만 브로맨스이면 되기 때문이다. 단지 한 가지 우려는 아내와 제수씨의 반응인데, 아마도 이런 사실을 싫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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