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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Aug 13. 2021

흙밭 농구장 버저비터

나에게서 멀어진 스포츠 농구



"빰빰빰빰 빰 빠밤 빠 빰 빠밤"
"처음부터 할 수는 없는 거야~~"



 장동건과 손지창이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서로 슛하는 장면이 지나간다. 심은하와 이상아의 앳된 얼굴이 스쳐 지나가며, 박형준과 이종원까지 반갑게 등장한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주제곡과 인트로인데, 티브이에 다시 나오는 게 아니고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잔상이다. 30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들 중에 어느 하나가 내 소중한 추억상자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승부가 방영한 90년대 후반에는 마이클 조던, 슬램덩크, 농구대잔치뿐만 아니라 3on3까지 어딜 가도 온통 갈색 공만 보이는 농구의 시대였다. 운동장은 흙밭이었고, 한편에 농구골대가 즐비했으며, 사각 림을 포함해서 10개 이상 설치된 곳도 많았다. 워낙에 인기가 많다 보니 메인 농구장에는 맛집 대기표를 끊고 기다리듯 장사진을 이뤘고, 다음 시합을 준비하는 인원들이 붐볐다. 대기하는 인원들은 앞 시합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시합 중에 화려한 어시스트나 클린 슛이 나오면 박수를 쳐주는 관중의 역할도 했다. 부잣집 도련님들은 나이키 조단이나 리복 샤크를 신고 나타나 짙은 갈색의 스폴딩 농구공을 튕기며 운동을 했고, 평범한 집 자녀들은 양키시장에서 샀을 법한 나이키 상표가 붙은 신발을 신고 숫자 23만 적혀있는 이름 모를 적색 유니폼을 입고 등장해서 고무대야 색깔과 비슷한 농구공을 던지며 서로 어울렸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80년대 후반이었고, 지금은 신부님이 되신 사촌 형의 영향을 받아서 유재학이라는 선수를 알게 되었고, 어느 시합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경기가 끝나기 직전 중앙선 근처에서 던진 '버저비터'를 보고 농구의 매력에 빠졌다. 그 후 어디서 농구공을 주워왔는지 모르겠지만, 드리블을 하면서 등하교를 했고, 수업이 끝나면 정글짐 옆에 있는 흙밭 농구골대로 가서 연신 볼을 던졌다. 잘 들어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던지면 골대에 맞고 떨어진 공을 다시 줍고 또 던지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가끔 동네 형들이 오면 같이 몇 번 던지다가 시시하다고 돌아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굴하지 않고 큰 목표 없이 계속 공을 던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농구는 야구나 축구에 비해 인기가 없었다. 그런 농구를 좋아하는 나 역시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다닐 때 즈음 농구 붐이 형성이 됐다. 난 키가 작은 편이라 볼 배급을 하는 가드 역할을 많이 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농구를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드리블은 자신 있었고, 꾸준하게 혼자 연습한 슛도 제법 잘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게임을 리드할 수 있는 리딩 가드를 하며, 팀을 이끌었다. 말이 리딩가드지 시작할 때 공을 상대방 진영까지 드리블해서 이동하고 슛보다는 패스를 많이 하면 된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초등학교 동창 몇 명과 팀을 구성했다. 잘하는 두세 명과 그럭저럭 따라오는 서너 명이 한 팀이었는데, 승률도 제법 괜찮았다. 하루에 여섯에서 일곱 번 시합했는데, 거의 매일 이겼고, 일주일에 한두 번 졌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잘한다고 이름이 알려졌고, 중학교 3학년 때 반별 농구대회에서도 우리 반이 우승하는데 큰 역할도 했다. 결승전에서 전후반전이 동점으로 끝났고, 심판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농구에 '골든볼'을 도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규칙을 바꾼 것 같다. 숨을 고르고 연장전이 시작됐고,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운 좋게 내가 상대방 공을 가로챘다. 이어서 상대방 진영까지 수년간 연습한 드리블로 나아갔고 골대 앞에서 잠시 멈췄다. 보통은 레이업슛을 한다. 어린 마음에 긴박한 상황이라 긴장했던 것 같다. 숨을 크게 한번 쉬고 침착하게 점프슛을 했다. 손을 떠나 백보드로 향하는 농구공은 상표가 보일 만큼 천천히 움직였다. 백보드에 맞고 림으로 내려가는 농구공은 그물에 걸치면서 잠시 멈추고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영화 같은 내 인생의 첫 '버저비터'였다. 골과 함께 시합 종료를 알리는 긴 휘슬 소리가 운동장을 울렸고, 우리 팀 선수들이 두 팔을 벌리고 환호하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어서 흙밭 농구장을 둘러싸고 있던 백여 명의 모든 친구들이 나를 둘러싸서 서로 치고받으면서 함성을 질러댔다. 강강술래 같이 돌다가 버저비터의 주인공인 나를 헹가레 치면서 승리를 만끽했다. 어쩌면 내 영광의 순간은 그때였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농구부 서클에 들어가기 위해 어려서부터 같이 농구한 친구와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레이업 슛, 점프 슛, 3점 슛이 1차 테스트였고 합격한 인원들은 팀을 구성하고 시합을 한 뒤 최종 선수를 선발했다. 난 무난하게 합격했는데, 친구는 굳이 레이업 슛을 정면에서 안 하고 사이드에서 한다고 허세 부리다가 1차 테스트에서 떨어져 버렸다. 최근 다시 만나 20년 만에 농구를 같이 했는데, 그 친구의 여전한 사이드 레이업 슛을 좋아한다. 



 대학 때 까지도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농구의 열기가 점점 식어가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지금도 다양한 운동을 즐기며 살고 있는데, 유독 농구할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격렬한 운동이다 보니 야구, 축구, 농구 등 구기 종목은 멀어지고, 골프, 테니스, 배드민턴, 달리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전처럼 흙밭 농구장은 찾아볼 수도 없고, 공원을 달리다가 마주하는 우레탄 농구장은 항상 비어있다. 그나마 최근 방송매체에서 스포츠 스타들이 농구팀을 구성하여 시합하는  것을 보고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해 줬다. 프로 농구 팀도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올림픽에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농구는 나에게 친구들과 함께 땀 흘리며 슛하고 패스하는 운동이었는데, 언제부턴가 하는 스포츠가 아닌 보는 스포츠가 된 것 같아 아쉽다. 가끔 쇼핑몰에서 농구 골대를 발견하면 불끈하지만 딸 뒷바라지가 현실이다. 아직 늦지 않았기에 무더운 올여름 흙밭 농구골대로 달려가 30년 전 버저비터를 한번 더 던져보고 싶다. 아직 영광의 시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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