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꽃샘추위가 불고 가을에 해가 바뀌듯
소나기가 멎으면 볕은 뜨고, 아무리 찬 바람이 불어도 봄은 온다. 당연한 세상의 진리가 이렇게나 무용하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4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눈을 뜨고 첫번째로 한 일은 그를 생각하는 거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발인을 지켜봤던 나였기에 두번째로는 그의 바로 옆에서 곁을 내어주던 사람들의 슬픔을 떠올렸다. 오늘은 정말로 그가 세상을 뒤로한 채 하늘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날이었다. 세상에 무수한 그림을 수놓은 그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일. 별과 달과 꽃을 좋아하던 그가 비로소 그것들과 온전히 친구가 될 수 있게 된 날. 하지만 고작 이삼일이라는 가시적인 애도 기간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소화하기에 턱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실은 나부터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눈물인 것 같아 밤마다 혼자 끙끙 앓았던 걸. 그의 영상을 보며 웃음짓는 게 마음을 표현하는 전부였던 내가 슬퍼할 자격이 있을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내가 뭐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해사한 웃음을 보면서 뱉어내지 못할 말들이 계속 울렁거렸다. 뒤엉킨 마음을 제대로 한번 속 시원히 드러내지 못한 게 가여워서 눈물이 났고, 내 청춘도 어쩔줄 모르면서 눈부시게 빛나던 그의 청춘이 아쉽고 아까워서 눈물이 났다.
내 마음은 항상 감청빛이었다. 세상의 명과 암 중에 암을 집중적으로 조망했던 시기에 나를 억눌렀던 건 나라는 존재의 ‘필요성’이었다. 아빠가 퇴직을 한 후 가세가 기울었다. 젊은 인재가 필요했던 회사를 탓할 수 없고, 등떠밀려 ‘명예퇴직’이라는 선택을 한 아빠를 탓할 수는 더더욱 없다. 아빠는 1800만원을 주고 콜밴을 구매했다. 아빠는 누군가 툭 내뱉은 말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몇 번을 고민할 만큼 섬세하고, 어린 시절 지하철에 껌을 파는 아저씨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나에게 천원을 쥐어줄 정도로 가느다란 마음의 소유자였다. 가족끼리 여행을 갈 때 외에는 운전을 잘 하지 않던, 그리고 공장에서 기계 부품만 매일 만지던 아빠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오래 버틸 리는 만무했다. 당시 내 나이 열한 살이었고 언니는 목전에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아빠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아빠는 ‘손님이 많았다면’ 악착같이 버텨냈을 것이다. 아빠가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거금을 주고 산 콜밴 차량을 처분한 것은 효율과 적성을 바탕으로 둔 고도의 고민의 방증이었을 테다. 엄마는 그때부터 회사식당 일을 10여 년간 했다. 시간에 맞춰 수백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지금 이 문장을 쓰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것쯤은 안다. 엄마는 열과 불이 가득한 공간에서 비오듯 땀을 흘리며 팔꿈치만한 솥에 국을 끓이고 밥을 안쳤다. 저 먼 행성의 궤도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의 그릇을 반복적으로 헹궈냈다. 새벽이 되면 엄마는 곤죽같은 휴게실에 누워 <동행>을 봤고, 야간 근무 조가 끝나는 날이면 목욕탕에 가 뜨거운 물에서 우리한 허리와 팔목을 달래는 게 전부였다.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고 일을 그만두게 됐지만, 아직도 나는 엄마를 떠올리면 겨울 저녁에 목도리를 둘둘 매고 출근하던 뒷모습이 떠오른다.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공부를 할 때만 해도 엄마와 아빠는 일을 하는 게 당연했다. 엄마, 아빠니까. 그런데 조금 더 자라서 부모님의 시간과 맞바꾼 돈을 지불하고 전공 수업을 듣다보니 적어도 그만큼의 책임을 다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원치 않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경험으로 깨우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나는 타인과의 비교에 익숙해졌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과 척력이 작용하는 건지 애를 쓰고 말을 할수록 오히려 이상과 멀어졌다. 무리에 섞이고 싶어 항상 연기를 하고있는 느낌이었다. 책상에 앉아 늘 뭔가 깨작였지만 나의 세상은 작았고,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소식을 하나둘 들으면서 결국 나는 '재능'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장 조별과제 하나만 하더라도 나와 걸리는 동기들을 보면 스스로도 안 됐다고 자조할 정도였으니까. 나에게 필요성은 곧 재능과 동어였다. 그래서 무대에서 자신의 필요성을 매번 증명하는 그가 참 부러웠다. 춤과 노래에 재능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나였지만, 신이 그 사람을 만들 때는 재능 총량의 법칙을 어기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했다. 자신만의 실력을 통해 존재감을 입증해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면, 부끄러움없이 1인분의 삶을 거뜬히 소화해내는 그는 항상 눈부셨다.
영상을 돌려볼 수록 작은 ‘챌린지’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성실함에 처음처럼 눈물이 났고, 그러다가 역시 마음이 어두울 때 내가 사랑했던 이유가 있었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삶의 사각지대에 서있다 느꼈을 때 나는 빛나던 그를 보며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다 다짐했다. 그랬던 그는 어디에 있을까. 이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세상에는 수많은 노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노래에 맞춰 그가 혼자 추는 춤이 궁금해졌다. 다시는 보지 못할 춤이. 여름에 꽃샘추위가 불고 가을에 해가 바뀌는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나 죽었다, 라는 말은 애초에 그에게 성립되지 않는 말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니 꿈에서라도 조금만 더 재잘재잘 이야기해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다.
집에 있기를 좋아한다. 특히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더 그렇다. 점심시간 의미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가끔은 웃지만 이따금씩 ‘이럴 시간에 일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저며든다. 10년 전 내가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있을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른이 되고난 후에도 마음처럼 흘러가는 일이 얼마 없다. 얼마 전 회사에서는 본인의 개성을 찾아줄 만큼의 여유로운 공간이 되지 못하니, '나다운 것'은 회사에서 찾을 생각은 접어두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나다움을 아직 잃고싶지 않은 나는, 사회에 적응할 수록 오히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원래 타고난 집순이인데다가, 여러가지 관계와 책임에 겁없이 뛰어든 후부터는 말하는 방법을 더욱 잊어버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적응하고 꼬리내리는 게 습관이 되었고, 사람들과 함께일 때 오히려 외로웠다. 집에서 네모난 화면을 보고 글로 적힌 세상을 보며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외려 편해졌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갑자기 이별선언을 듣고는 혼자라는 게 그렇게 괴로울 수 없었는데, 시간의 힘인지 울고 추억하며 버텨낸 후로는 혼자 보내는 것은 정말로 내가 사랑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집밖을 나서기로 다짐했다. 한 가지에만 골몰하게 몰두하는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도 좋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약속이 없으면 나가서 당장 뭘해야할지도 모를 정도로 몸이 굼뜬 편인데, 가만히 있다보면 끝도 없이 깊이 아래로 몸이 꺼질것만 같았다. 뜻도 없이 향한 번화가 한가운데는 오늘이 하필 지구의 날이라며 행사 부스가 일렬로 길게 늘어져있었다. 누군가는 룰렛을 돌리고, 누군가는 예전에 봤던 TV 프로그램처럼 칠판을 들고 퀴즈를 맞추고 있었다. 한손에 풍선을 든 꼬마 아이는 신나서 총총 뛰더니 이내 몇 걸음 가지 못해 앞으로 넘어졌고, 이를 본 엄마는 뒤늦게 달려가며 아이를 나무랐다. 누군가에겐 지루하기만 했을 토요일. 한낮을 대피해 나온 가족 단위가 많았고, 소란한 틈 사이로 멀뚱멀뚱 하늘을 보다보니 마음 한 구석이 물큰해져서 고개를 내저었다. 하트 모양을 닮은 구름을 부려놓은 하늘은 크레파스로 칠해놓은 것처럼 새파랗게 물들어있었다. 하늘이 맑아도 이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도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캄캄하거나 빗길에 미끄러워서 헤맬 일은 없겠다,고 잠시 생각에 그쳤다.
“에코백을 매셨네요?”
이렇게 활발한 세상이 낯설어서 장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는데, 귀 뒤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고개 하나 정도의 키 차이가 나는 남자가 서있었다. 고작 몇 초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눈동자가 참 말갛다고 생각했다. 새까만 머리색과 눈동자, 그리고 동글동글한 콧망울이 왠지 익숙했다.
“에코백 만큼 쉽게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은 없죠.”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조금도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훌쩍 다가와서는 에코백을 맨다고 역성들어주는 게 어색해서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를 지킨다는 게 생각만큼 어려운 건 아니거든요.”
그러더니 그는 부스에 잠시 들어가더니 텀블러를 내 손에 쥐어줬다. 괜찮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파란 조끼를 입은 남자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엉거주춤 받은 텀블러에는 삐뚤빼뚤한 폰트로 ‘53주년 지구의 날 행사’라고 쓰여있었다. 53주년, 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어이없게도 너의 53살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그때되면 뼈가 부서질 듯 춤을 추긴 힘들겠지. 무지개 모양으로 활짝 휘어지는 눈웃음을 닮은 자식을 한두명쯤 낳아서 가족 예능 프로그램에 나올 수도 있겠지. 지금이야 문짝만한 어깨를 자랑하지만 그때되면 아무래도 배가 조금 나오고 머리가 조금 벗겨졌을 지도 모른다. 함께 나이를 먹은 멤버들과 근황이라며 함께 사진을 올릴 수도 있을 테고, 지금 많은 아저씨들이 그렇듯 골프나 낚시같은 취미가 생겨서 하루종일 유튜브로 관련 영상을 찾아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있을 때 잘해야 한다고 늘 되새긴다. 후회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과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음알음 깨닫고 있다. 보고싶다고 볼 수 없는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멀리서라도 마음을 표현하자고 이야기한다. 내가 뭐라고,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번만이라도 그의 안부를 물었더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오늘 회사에서 이래서 힘들었고, 이래서 네가 좋고 주절주절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 요즘 너는 어떻냐고, 힘들지 않냐고 한번만이라도 더 물어볼 걸 후회한다.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너도, 열심히 몸을 가꾸던 너도 좋지만, 사실 뜬구름잡는 장난을 치며 여섯살 난 아이처럼 헤실헤실 웃고, 오늘은 다이어트고 뭐고 라면이 먹고싶다고 투정하던 무대 뒷편의 천진함을 더더욱 사랑하게 됐다고 꼭 말해줄 걸. 그것이 팬과 가수의 입장에서라도.
강이 흐르듯 구름이 지나고 있었다. 솜사탕 같은 바람을 타고 민들레 홀씨가 흩날리고 있었다.
정말 잘 가고 있다고, 그가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