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캐슬' '지금 우리 학교는'을 지나 '소년 판사'까지
나는 아주 고약한 버릇이 하나 있다. 아웃사이더 될 깜냥도 안되는데 아웃사이더 흉내를 낸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건 안 보고 안 듣는다. 그러다가 남들이 관심이 조금 시들 해 들 때쯤, 그게 뭐였지 하면서 슬며시 들여다보고는 흠뻑 빠져드는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는 중2병의 심정을 지닌 어른이의 심리랄까. 남과는 다르고 싶지만 그렇다고 또 집단에서 벗어날 용기는 없는. 장범준의 목소리와 노래가 대표적이었다. 슈퍼스터 K 뭐 그런 유치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봐. 하며 '장범준'에 열광하던 대학 동기들을 어린애 취급하다가. 한두 계절 후에 나는 그의 열혈 팬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너는 선생님으로서 SKY캐슬 보고 어떤 생각이 들어?
나: SKY캐슬? 그게 뭐야? 새로 나온 아파트 브랜드야?
하지만 이번에는 한 두 계절이 아니라, 2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SKY캐슬'이라는 드라마에 빠져드는 시간은 단 2시간이면 족했다. 나는 그야말로 정주행 했다. 넷플릭스로 전편이 공개되어있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일주일에 한 편씩만 봤지 감질나게. 같은 말을 속으로 하며 봤다. 보다 보니 재미를 넘어 공감을 넘어 피부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각 에피소드들마다 주인공들이 한국의 수험생으로서 느껴야 하는 어떤 고통에 대한 거울신경반응이었다. 동시에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마주하는 일이었으며, 그 상처가 여전히 어른들에 의해 사회에 의해 때로는 학교에 의해 아이들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었다.
대학수능을 본 지 15년이 지난 지금, 그것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SKY캐슬'의 배경이 되는 대치동과 그 특권층이 곧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무관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언제나 '대치동'으로 불리는 사교육 시장의 최전선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며 대한민국 전체 교육에 영향을 준다. 대입이 지상과제가 되어버린 공교육에서 그들을 제쳐두고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논의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에 가깝다. 나 역시도, 그리고 나의 부모 역시도 그들이 다니는 학원, 그들이 하는 방식의 관리시스템을 모방하며 사교육에 끊임없는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행복하길 바랬다. 공교육에서는 해줄 수 없는 수준별-맞춤형 학습이 나의 성적을 올리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나를 데려다주고, 그 대학이 나를 원하는 삶으로 이끌어줄 것이라 믿었다. 대학수능을 본 지 15년이 지난 지금, 그것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우리는 대학만 가면 이성친구도 생기고, 원하는 직장에 취직해서 행복한 삶을 살 거라는 그리고 그것이 마치 진정 행복한 삶의 전부라는 환상을 어려서부터 주입받는다. 비단 부모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 사회가 그렇게 말한다. 과연 그런가? 극 중 가장 높은 성적으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간 학생의 자살로 시작하는 'SKY캐슬'은 집요하게 묻는다. 과연 그런가?
과연 명문대를 들어가면, 그래서 좋은 직장에 가면, 부자가 되면 행복한 삶을 사는 건가?
'SKY캐슬'이라는 드라마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다. 답을 알기 위해서는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않아도 되었다. 이 드라마, 서론부터 결론의 맺는다.
아니다.
'SKY캐슬'에 대한 공론이 가라앉을 때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가 벌어졌고, 교무부장인 아버지로부터 답안지를 받은 쌍둥이 자매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서글프게, 이제는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이제 웬만한 비리와 부정에는 무던해진 탓일까. 아니었다. 비겁하게도 이제 내일이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지옥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다. 흙탕물이 튀기고 가끔 피도 보였지만, 그럴 때면 오히려 안도했다. 아 나는 이제 아니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고 나와서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처럼. 아. 공포는 영화의 것이고, 내 세상은 평온하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더 이상 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다가 올해 넷플릭스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을 봤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불필요하게 선정적이었다. 누가 봐도 킹덤과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 기댄 좀비 배틀 로열극이었다. 단지, 시대를 현대로, 장소를 학교로 옮겼을 뿐.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SKY캐슬'이 생각났다. '지금 우리 학교는'과 'SKY캐슬'을 같은 테이블에 올려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 두 드라마는 기획의도도 다르고, 주제의식도 다르며, 연출의 방향성도 완전히 다르다. 'SKY캐슬'이 현실을 그대로 그린 하이퍼 리얼리즘 작품이라면, '지금 우리 학교는' 은 대상의 느낌을 충실히 표현해낸 인상주의로 비교할 수 있다면 과도한 유추일까. 나에게 우리 학교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그려낸 게르니카 같았다.
우리 학교는 겉으로 보기엔 친구들의 우정과 가족 간의 사랑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전염된 좀비(학교, 학생, 학부모)들과 실체 없는 두려움을 다스리고자 하는 계엄군 간 긴장이며, 또 그 안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는 구성원들의 치열한 생존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천재이면서 괴짜인 전 연구원 현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 만든 학교폭력에 고통받는 아들을 위해 만들어낸 바이러스는 치유가 불가능했다. 어떤 계기로 학교에서 퍼져버린 바이러스는 학교 전체, 그리고 가상의 지역인 00시를 바이러스로 물들인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가 내린 결정은 숙주에 대한 파괴. 그렇게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고 나서야 드라마는 쓸쓸히 막을 내린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학교에서부터 학습된다. 철저하게 성적으로 계급화된 학교에서 학생들이 살길은 공부하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까무러치기는 순우리말 '가무러치다'의 센 말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정신줄을 놓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마이웨이다. 하지만 까무러치는 것도 세련되게 잘해야 한다. 얕보이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좀비였다. 그리고 지금도 좀비일지도 모른다. 좀비는 사고하지 않는다. 청각자극(사회가 주입하는 소음)에 반응하여 자신의 배고픔(욕망)을 채우려 달려들 뿐이다. 그렇기엔 좀비들에겐 자식도, 친구도, 선생님도 없다. 단지 배고픔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현재 우리 교육의 자화상 아닐까. 오징어 게임이 우리 사회에 대한 자화상이라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그 자화상의 주인공이 들고 있는 커피 컵 정도라고 하면 어떨까.
다른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욕망이라면 이는 사회악이다.
한편, 김혜수 김무열 주연의 '소년심판'은 미성년자인 소년범들과 소년법정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에피소드들 중 한 사립고등학교에서의 답안지 유출 사건이 나온다. 사회 저명인사나 기업인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답안지가 유출됐지만 그들(학부모와 학생들) 태도는 어디까지나 당당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왜 어떤 죄의식도 가질 수 없는 파렴치한이 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회이고, 사회 이전에 우리의 의식이며, 의식 이전에 우리의 욕망일 것이다. 욕망을 가진 것을 비난할 수 없다. 인간은 유기체로서 욕망으로 삶을 영위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칠 때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특히, 다른 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욕망이라면 이는 사회악이다.
'SKY캐슬' '지금 우리 학교는'을 지나 '소년 판사'까지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안다. 그런 의미에서 세 작품은 모두 문제적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문제를 직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 문제인 것은 우리 자신이다. 솔직하지 못함. 인지부조화.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지부조화가 부조리한 현대사회의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생존기법 중에 하나라고 했다. 인지부조화는 개개인의 생존기법이면 족하다. 우리들에겐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어른다운 어른이 필요하다. 그래야 제대로 된 어른들을 기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사회적,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 놓고 피상적으로 혹은 일회적으로 벌이는 모든 (교육) 개혁은 모두 미봉책인 것이다.
힘들고, 소외되고, 아픈 것, 그것은 언제까지나 ‘너’의 이야기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으면, 그렇다면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이야기를 흘려듣는다면, 그래서 올챙이가 살아갈 개울을 더럽히고 망친다면 그 개구리라는 종(種)에게 밝은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