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사피엔스, 매트릭스, 그리고 쇼생크 탈출

by just in


창조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금서(禁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생물학(진화론)적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와 유사하게 생긴 많은 종(種) 중에 하나이다. 단지, 1만 년 동안 지구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종이 었기 때문에 착각하게 된 것이다. 사피엔스인 우리가 이 지구 상의 유일무이한 주인이자, 영속적인 지배자라고... 저자는 우리의 많은 편견과 통념을 하나씩 깨나 간다. 인종, 성별, 국가, 사회 각 분야에 우리도 모르게 믿고 있었던 가상의 질서, 허구, 집단적 상상... 뭐라고 불러도 존재하지 않는 것들. 그러니까 픽션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잡아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한다.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 출판 김영사 발매 2015.11.24.


대학생이 막 되던 해였다.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너무 감명 깊게 본 나머지 친구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했던 날 밤을 기억한다.


"우리는 지금 컴퓨터들이 만든 가상의 세계인 매트릭스에 갇혀 있어. 그러니까 우리 같이 빨간색 알약을 먹고 진짜 세계로 떠나야 해!"


진지했던 내 표정과는 다르게 ,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끄덕였던 것 같다. 아마 나는 몇 번을 더 진지하게 재촉했을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15년이 흘렀고, 새로운 매트릭스 시리즈가 나왔다. 매트릭스:리저렉션.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15년 전 친구에게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아! 빨간색 알약!"


친구에게 권했던 그 좋은 알약, 거짓된 세상을 뒤로하고 진실된 세상으로 가게 해준다는 알약이 아직도 내 주머니에 있는 듯했다.


당시 세 편의 영화로 완결된 듯했던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빨간색 알약을 대가는 너무 컸다. 주인공은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났지만 무서운 괴물들과 싸웠어야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뻔하고, 본인은 눈이 멀어버린다. 영화라서 초인적인 힘으로 어찌 이겨내지만 현실이라면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들 천지였다. 슬며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빨간색 알약의 존재를 15년이 지난 지금에야 피부로 느낀 것이다. (파란색 알약은 이미 내 몸에 있다!)


새로운 매트릭스:리저렉션은 사실 그저 그랬다. 그 당시에는 문제작이었으나, 지금은 전염병이 더 문제였고, 어느 누구도 우리가 스스로 구축하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사는 현재의 인터넷 천국이 지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애플 社의 스티브 잡스가 해낸 혁신적인 발명품(아이폰!) 이후로 우리의 매트릭스는 더욱 강화되었다. 15년 전의 우리는 기껏해야,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웹사이트에서 웹서핑이나 하고, 때때로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지금에 비춰보자면 아주 light user 였다. (실제로 사용하는 하루 동안 수용하는 정보의 양만 비교해봐도 큰 차이를 알 수 있다. 당시엔 1GB만 있으면 한 달은 넉넉히 썼지만, 이제 1GB를 쓰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렇게 영화계의 공공연한 속담, "형만 한 아우 없다." 아니 "본 편보다 나은 속편 없다."을 몸소 체험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책장에 꽂혀 먼지를 쌓아가고 있는 사피엔스를 읽었다.


사실, 사피엔스는 그냥 '전시품'이었다. 나는 지식인이요. 를 보여주는 21세기 지성인의 대표적인 인문서적이랄까. (20세기에는 총 균 쇠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신기하게도 유발 하라리는 이 책의 집필 동기를 총 균 쇠라고 언급했다!)


우연히 EBS의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유발 하라리 교수의 강연(아직 위의 홈페이지에는 업로드되어있지 않다.)을 보게 됐다. 그리고 시선의 연장선에 우연히 오래전에 사두었던-하지만 두꺼워서 손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하지만 중고서적으로 팔기엔 전시품으로 손색이 없었던-'사피엔스'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요인은 세 가지이다. 첫째,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둘째,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셋째,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유발 하라리 책 '사피엔스' 中)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영장류의 한 종인 사피엔스가 인지, 농업, 과학혁명을 통해 발전해온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예측에 대한 책이다. 그중 한 챕터 농업혁명에 대해 논의하면서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한다. 인지 혁명 즉, 문자 체계를 이용한 의미를 만들어 협력을 이끌어 내 발전하게 된 사피엔스들은 '질서'를 만들어 사회를 운영했다. 하지만 그 '질서'는 어디까지나 '허구'였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마치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각성 전(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알약을 먹기 전) 살던 아주 안전하지만 아주 지루했던 회사처럼 말이다.


네오의 각성 후, 저항과 전쟁을 치러야 했던 대상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기계들 뿐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내가 '그'가 맞을까? 나에게 사람들을 해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생을 가공의 매트릭스에서 살아왔다. 매트릭스는 그에게 실재한다. 내 오감으로 소고기 스테이크를 씹고 뜯고 맛볼 수 있는데 이를 의심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물질화된 상상의 질서들이다. 또한, 그가 살아온 모든 삶은 현대 금융 자본주의의 첨병이자 IT혁명의 시초인 미국에 국한된다. 그의 욕망은 소수의 자본가에 의해, IT기업에 의해 조작된다. 즉, 그의 욕망은 소비 자본주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절망적인 것은, 이것을 깨닫는다 하여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하듯, 상상의 질서는 모든 이들에게 주입되어 있고 이를 포기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이비 교주가 되는 등의 극단적인 몇몇 방법을 제외하고는.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일 뿐이다.(유발 하라리 책 '사피엔스' 中)


우리의 어린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밈(meme) 었던 유명한 영화 속 장면이 있다.



바로 이 영화, 이 장면(한 장면이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아예 대표 포스터가 되어버렸다!)


쇼생크 탈출.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출연팀 로빈스, 모건 프리먼 개봉 1995. 01. 28. / 2016. 02. 24. 재개봉



작은 망치 하나로 오랜 세월에 걸쳐, 감옥의 한쪽 벽을 파내 장장 몇 시간의 좁고 더러운 오물관을 통해 빠져나온 주인공이 두 팔을 벌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는 친구에게만 살짝 일러줬던 국경지역에 외딴 어촌으로 간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주인공에게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도대체?


다짜고짜 경제전문가들을 앉혀놓고, 유망한 종목과 섹터를 대라고 하는 방송사들처럼, 우리는 모두 다급하게 물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고!



답은 매트릭스:리저렉션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 (답이 꼭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영화를 보고 답을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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