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없이 살아온 선생님의 꿈 찾기
불의의 의료사고로 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은 우리 현대인의 '꿈 없음'을 조금은 거칠게 꾸중한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그 나이를 퍼먹도록 그걸 하나 몰라(신해철,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中)
장래희망이 존재의 이유였던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 조금 더 진지하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 생각해봤어야 했다. 12년간의 수험생활 그리고 1년간의 재수생활 끝에 찾아온 꿈만 같은 대학생활에, 나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자유와 방종 사이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통해서라도 사회경험을 쌓았어야 했는데 교대생이라고 편하게 돈 버는 과외에 맛 들여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방학 때 여행이라도 갔어야 했는데, 천성이 집돌이인 나에게 방학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안에 있을 자유라는 것이 달콤했다. 학원도 학교도 가지 않아도 됐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 휴학이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낯선 환경에서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아르바이트, 여행, 그리고 휴학. 모두 나에게는 일종의 '경로 이탈'이었다. 항상 부모와 학교라는 내비게이션이 친절히 안내하는 대로만 살았던 나머지 나는 삶을 패키지 관광하듯 살고 있었다. 패키지 관광을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일정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일정이 얼마나 숨 막히는지 말이다. 내 돈 내고 떠나 온 여행이지만 나는 결정 권한이 없다.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보고, 듣고, 맛본다. 무엇인가를 감상하거나 여유롭게 즐길 시간은 사치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리려고 하는 사람은 가이드 그리고 팀원들에게 욕먹기 좋다. 지금 한시가 바쁜데, 어디 갔다 이제와요! 자 손님은 이제부터 제(가이드) 뒤에서 바짝 따라오세요!
대학 졸업 후 선생님이 되기 전까지, 정확히는 선생님이 되어서도 나는 가이드 옆에 바짝 붙은 투덜이 손님이었다. 투덜대기는 했다. 속으로 욕도 해보고, 괜히 가이드 설명에 어깃장도 놓아보고, 한눈파는 척하며 대열에서 이탈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결국 정신 차리고 보면, 보이는 것은 가이드의 뒤통수였다.
한 번은 선생님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며 원망 조(?)로 부모님에게 투덜거렸던 일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부모가 강요한 적 없다. 다른 것이 하고 싶다 하는 것을 막은 적 없다. 다른 것을 하고 싶으면 네가 노력해서 해봐라.' 뒤통수가 얼얼했다. 생각해보니 부모님은 공부를 강요하진 않았다. 또,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것을 만류한 적도 없었다.
아뿔싸!
그랬다. 결국 내 삶은 주인은 나였다. 그 모든 핑계를 대봐도 소용없었다. 결국 누워서 침 뱉기가 될 뿐이었다. 나는 겁쟁이였고, 부모님은 겁 많은 아들을 잘 인도해준 죄(?)밖에 없었다. 수원수구.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오.
나는 내가 ‘가스 라이팅’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가고, 대학 가서 취직하고, 돈 모아서 결혼하고, 집 사고, 애 낳고...' 말줄임표의 끝에 행복이라는 말은 오지 않았다. 다들 침묵할 뿐. 우리는 어쩌면 모두 속고 있다. 평범함 속에 답이 있다고, 남들 사는 대로 살자고. 자기 자신 다움? 그건 BTS나 하는 거야.
호모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또 하나의 명저, <호모 데우스>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피엔스(현생 인류)가 다른 기타 영장류나 동물들에 비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의 질서 믿고 그에 따라 유연하게 협력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를 비롯한 돈 사회 들 인간사회의 많은 것들이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가치들이다. 이것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데,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미친놈’ 혹은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보다 구체적인 이유는 그의 전작 <사피엔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촘촘한 의미망 안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감히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인간의 상호주관성 때문이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님에도, 즉 문화권이나 국가별로 보자면 굉장히 주관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며 그것이 곧 정설이 된다. 객관화되는 것이다. 당연시되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다(객관적 사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면 좋다(주관적 느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면 성공한다(상호주관성)
여전히 이런 상호주관적인 상상의 질서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 허우적이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한 명씩 한 명씩 깨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가스 라이팅의 피해자라는 것을.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것과 한 사람이 성공적이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그 꿈은 대단하지 않다. 다만, 세상의 기준에 조금 다를 뿐이다. 하지만 가끔 이런 꿈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직도 내가 세상의 기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꿈을 꿔야 한다. 나에게 속지 않게, 또 나를 속이는 세상에 속지 않게!
도망치지 않으려 피해가지 않으려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오 그런 나이어 왔는지 나에게 물어 본다
부끄럽지 않도록 불행하지 않도록 워워어 않도록(이승환, 물어본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