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ID와 정체성 Identity
2000년대 초 PC는 각 가정에 거의 보급되어 있었고, 인터넷도 그랬다. 지금의 처리속도와 통신 속도에 비하면 느리고 느린 PC와 인터넷이었겠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다.
아이디를 처음 만들게 된 거는 중학교 2학년 수행평가 제출 때였다.
국어 시간, 당시 젊은 피 선생님이셨던 국어 선생님은 이메일로 중간고사 수행평가를 제출하라고 하셨다. 1년 전인 중학교 1학년 때만 해도 플로피 디스크로 제출했던 과제였다. 선생님은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칠판에 크게 써주셨고, 그것을 적어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고민해봐도, 적당한 이메일 주소가 생각나지 않았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생각났고, 선생님의 아이디를 몇 글자 바꿔 내 첫 이메일 주소 겸 아이디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 아이디를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쓰고 있다.
20년 전, 중2병에 걸린 중2가 생각해 낸 아이디는 생각보다 의미심장했다. 당시 나는 반에서 만년 2등이었는데, 1등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숫자와 알파벳을 잘 조합해서 1등이 되고 싶다는 뜻의 약어를 아이디로 한 것이다. 그렇게 바꾸고 나서 이은 지, 아니면 조금 시간이 지나서인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드디어 반에서 1등을 했었다. 그리고 그 1등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공부했었던 그 시절이 아득하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뒤로 미뤄둔 채 나는 나만의 목표에 골몰했다. 1등. 그것이 유일한 내 목표였고,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항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끝에 높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끝마쳤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곳에 입학했다. 재수학원. 그곳은 1등들이 모인 곳이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해당 재수학원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대입 성과를 자랑하는 재수학원이었다. (심지어 이 학원을 들어가기 위해 나는 또 시험을 봤다.) 난 그곳에서 반 1등은커녕 단 한 번도 그 근처에 간 적이 없다. 나는 정말 수많은 동네 1등 중에 한 명이었고, 그마저도 종종 1등을 놓쳤던 1등이었다. 버텼다. 버티다 보니 수능날이 왔고, 수능을 봤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더벅머리 재수생에서 대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대학생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시간들 속에서 한 가지 바뀌지 않은 게 있었으니 바로 내 아이디였다. 처음 발령을 받아 학교에 왔을 때도 나는 내가 중학교 때 만들었던 그 아이디로 시스템에 등록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아이디는 건재하다.
인터넷 홈페이지나 이메일에서 로그인에 사용되는 아이디(ID)는 영어 identification의 줄임말이다. 인터넷 세상에서 나의 신분을 증명하는 명함인 셈이다. 명함은 일종의 사회적 얼굴이다. 아이디 만들기는 자신을 아이디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행위이다. 나의 아이디는 그렇게도 1등이 되고 싶었던 중2 시절 나의 명함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가면을 벗으려고 가면과 얼굴 사이 손가락을 넣어봤다. 경계선이 없었다. 어느새 내 얼굴이 된 가면이 섬뜩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주 Identification을 위해 Identity를 희생해왔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기 위해, 나 원래 이런 사람인데.라는 한 마디를 어려워했고, 그렇게 살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내 아이디가 곧 내가 되어있었다. 정체성(아이덴티티)은 없고 증명서(아이디)만이 나를 설명했다.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자주 Identification을 위해 Identity를 희생해왔다.
나는 내가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여기서의 성공은 분야를 망라한다. 나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외에 모든 분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노력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언젠가는 빛을 발해 나를 후광이 비추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 년 일 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조금씩 벌어지는 틈들을 발견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특별하지도 특출 나지도 않았다. '특별함' 혹은 '특출남'을 명함 삼아 살아왔던 날들의 내가 조금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 번도 과감히 뛰어들지 않았고, 그래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잘 닦여진 길로, 안내자와 함께 걸어왔다. 물론 그 길이 마냥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은 평탄했다. 조금은 닳아있기도 했으며, 옆에 있는 가로수들에는 손떼들이 쌓여 맨질맨질 광이 났다. 고개를 들고, 뒤꿈치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비슷하게 보였다. 그리고 뒤를 보았다. 그들은 앞에 있는 사람들과 움직임이 달랐다. 내 옆을 보았다. 서로 눈을 마주쳐을 때, 우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는 한 번도 과감히 뛰어들지 않았고, 그래서 나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아이디를 바꾸는 건 번거롭다. 특히나 오랫동안 쓴 아이디라면 더욱 그렇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요즘, 아이디는 그 자체로 인감도장이며, 열쇠고, 보안 키이다. 모든 게 연동되어있고, 동기화되어있다. 귀찮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귀찮음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아이디를 바꿨다. 내 새로운 정체성을 대표하는 단어들을 조합했고, 귀찮지만 2년째 쓰고 있다.
새로운 자신을 맞이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한다. ID 변경을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아이디를 변경하시겠습니다?
당신은 새로운 삶에 도전하시겠습니까?